“고질적인 저비용 공사 관행과 부실한 감독·관리 때문에 곳곳에서 빚어지는 일인데 터파기 공사 초기에 문제가 드러나 차라리 다행인 것 같아요….”
26일 오전 서울 은평구 녹번동의 다세대주택 신축공사장 인근의 주택들에서 균열이 발생해 주민들이 대피한 가운데 이날 현장을 둘러본 안형준 건국대 건축대학장의 지적이다. 부실한 공사 안전관리 때문에 연말에 100명이 넘는 주민이 집을 떠나 대피하는 일이 일어난 가운데 관할 구청의 늑장대응과 고질적인 ‘안전불감’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또 나오고 있다.
은평구는 27일 붕괴 위험이 드러난 녹번동 주택 8개 동을 재난위험시설로 지정하고 이 가운데 2곳은 건축주에게 철거를 요청하겠다고 밝혔다.
9월 철거 공사를 마치고 이달 15일 착공된 2개 동 22채 규모의 다세대주택 건축 현장에서는 24일부터 인근 주택에 균열이 발생한다는 민원이 접수됐고 25일 저녁부터 균열이 급격히 확대됐다. 연휴가 지난 뒤인 28일 대책을 마련하려던 은평구는 결국 26일 새벽 “가스 냄새가 심하게 난다”는 주민의 신고를 접수한 뒤 가스관 파열을 확인하고 붕괴 위험 주택 2채를 안전등급 최하인 E등급으로 지정했다. 이어 2차 피해가 우려되는 주변 주택 5개 동에 사는 주민 등 132명에게도 대피 명령을 내렸다. 70여 명은 구청이 지정한 인근 모텔에 묵고 있고 나머지는 친척과 지인의 집에 머물고 있다.
27일 오후 은평구가 외부 전문가 4명을 투입해 안전점검을 벌인 결과 ‘지하 누수’와 ‘부실 지지대’ 두 가지가 사고의 이유로 꼽혔다. 언덕 한쪽을 파내며 흙이 무너지는 것을 막으려 경사면에 흙막이 지지대를 세웠지만 노후 맨홀에서 물이 새면서 상승한 토압을 버티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겨울에 살던 집에서 빠져나온 주민들이 분통을 터뜨리는 가운데 이달 초부터 은평구에 민원을 제기했지만 제대로 된 해결책을 마련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나온다. 한 40대 여성 주민은 “12월 초에 이미 집이 기울어져서 구청을 찾아 민원을 넣었지만 시공사에서는 겉면에 시멘트를 발라주는 게 전부였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은평구 관계자는 “12월 15일 이전에 굴토를 했다면 불법”이라며 “주민들의 문제제기가 있어 검토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또 12월 초의 민원은 주민과 업체를 연결해 해결했다고 덧붙였다.
안형준 학장은 “흙막이 공사가 부실해 문제가 발생하는데도 제대로 계측하거나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며 “설계, 시공, 감리, 감독관청 모두의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지은 지 20∼30년 이상 된 주택이 공사 현장을 둘러싸고 있는데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날 은평구는 공사장의 토사 굴착 부분을 다시 메우고 지지대를 보강하는 작업을 벌였다. 은평구 관계자는 “지반을 안정시킨 후에 정밀점검을 실시할 것”이라며 “철거 예정인 2개 건물 거주민은 시공사에서 임시 거처를 마련해 주고 신축 주택을 지어 주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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