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역사는 내일의 주인공이 만드는 것
스스로 세상과 부닥치고 스스로 깨달아 현명해져야
젊은이들이여, 새해 아침 벌떡 일어나 그대들의 세상을 만들어나가라
새해가 밝았다. 우리 앞에 다시 1년의 새 시간이 펼쳐질 것이다. 시간은 순간순간 그대로 흘러가 버리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며 거두어들이는 성과들을 담는 큰 그릇과 같다. 하루하루 담아내는 그 내용들이 쌓이면 역사가 되고 문명이 된다. 우리는 올 한 해 어떤 것들을 채워 넣을 것인가. 프랑스의 사상가인 생시몽 백작은 매일 아침 하인이 침실로 찾아와 “백작님, 위대한 일을 하셔야 한다는 걸 기억하십시오”라고 말하며 깨우도록 했다고 한다. 우리도 그렇게 호방하게 새해를 맞이할 일이다.
그러나 막상 우리가 당면한 현실이 결코 녹록지만은 않다. 경제계는 궁지에 몰려 어찌할 바 모르는 형국이고 사회 전반에 갈등과 충돌이 넘쳐나는데 이런 문제들을 풀어주어야 할 정치는 아예 암흑의 혼돈 그 자체다. 최빈국에서 출발하여 역사상 유례없는 고도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동시에 이루어냄으로써 세계의 모범 사례로 꼽혔던 대한민국이 아니던가. 왜 우리가 이렇게 맥을 놓게 되었을까. 혹시 우리는 미처 꽃을 피우기도 전에 시들어 버리는 조로 증세를 보이며 이대로 주저앉는 건 아닐까.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우리는 그런 정도로 약한 민족이 아니다. 아마 대한민국 국민만큼 기가 센 사람들도 세계에 흔치 않을 것이다. 우리는 좋게 표현해서 적극적이며 박력 있고, 나쁘게 표현하면 극성스럽기 한이 없고 엄청나게 공격적이다. 다른 나라가 수백 년 걸린 일을 그토록 빠른 시간 내에 이루어낸 동인이 여기에 있다. 우리나라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가 아니라 숨 가쁘게 돌진하는 ‘다이내믹 코리아’다.
문제는 지금까지의 성공 방식이 예전과 똑같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쩌면 성공 자체가 새로운 길을 가로막는 덫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이제 한 단계 더 도약하려면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고 거기에 맞는 새로운 해법을 찾아야 한다. 차제에 우리가 바라는 이상적인 사회, 바람직한 국가가 어떤 모습인지 한번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지난날 우리는 ‘부국강병’이 지상 목표였고, 그런 목표를 이루기 위해 ‘(신)중상주의’ 정책을 펼쳤다. 먹을 것 없어 배곯던 시대에 그런 목표 설정은 당연한 일이었고, 실제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어 우리는 후진국 상태를 벗어난 영웅이 되었다. 이것이 현재까지의 역사다.
이제 내일의 역사는 내일의 영웅들이 만들어가야 한다. 우리의 젊은 세대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현명한 발전을 이루어서 활력 넘치는 사회, 매력적인 국가를 만들고, 즐겁고 행복한 삶을 누리면 좋겠다. 그들이 그와 같은 목표를 이루도록 믿고 맡기도록 하자. 기성세대에는 지금의 젊은이들이 영 믿음직스럽지 않아 보일 수 있지만 사실 그것은 언제나 그래왔던 일이다. “요즘 청년들은 부모에게 대든다. 말세인 모양이다!” 기원전 3000년 고대 이집트 파피루스에 나오는 말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부모 세대가 볼 때에 청년들은 언제나 철없는 어린애로 보인다. 과연 그럴까?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볼테르의 소설 ‘캉디드’를 생각하게 된다. 순진한 주인공 캉디드는 이 세상은 완전한 상태로 되어 있다는 노철학자 팡글로스의 해석을 철석같이 믿는다. 그렇지만 캉디드가 실제로 돌아다니며 겪는 이 세상은 결코 완벽한 이상향이 아니다. 세계의 불행을 몸소 겪은 주인공이 마지막에 내리는 결론은 “우리의 에덴동산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즈음 팡글로스 박사는 이렇게 실토한다. “사실 나도 내 말을 결코 믿지 않았지만 한 번 그렇게 주장한 이상 계속 똑같이 말한 것이라네.” 젊은이는 구세대의 철학에 지배당할 게 아니라, 그들 스스로 세상과 만나고 스스로 깨달아 현명해져야 하리라. 그리고 그들의 밭을 갈아 새 세상을 만들리라.
프랑스의 어느 시인은 더 이상 전설이 없는 나라는 추위로 얼어 죽는 나라라고 말했다. 다음 세대의 전설은 다음 주인공들이 만들어갈 것이다. 그러니 새해 아침, 이들을 이렇게 깨워야겠다. “젊은 분들, 이제 그만 투덜대고 벌떡 일어나 위대한 일을 하셔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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