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초 강원의 한 연립주택. TV를 보던 이모 씨(50)가 거실 바닥으로 쓰러지더니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뇌출혈로 인한 뇌사였다. 평소 혈압이 높을 뿐 대체로 건강했던 이 씨가 의식을 차리지 못하자 가족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이 씨가 다시는 일어날 수 없게 됐다는 사실을 가족들이 받아들이기까지 3주가 걸렸다.
이 씨의 아들(25)은 호흡기에 의지한 채로 점차 병세가 나빠지는 아버지를 보며, 평소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주변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발 벗고 나서던 아버지의 모습을 회상하고 장기 기증을 떠올렸다. 다른 가족들도 이 씨가 마지막 순간에도 다른 이들을 돕고 싶어 할 거라고 확신하고 강원 강릉아산병원에 장기 기증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31일 새벽, 이 씨는 간과 좌우 신장, 오른쪽 각막을 환자 4명에게 기증하고 세상을 떠났다. 평소 좋지 않았던 왼쪽 눈과 다른 장기를 제외하고 이 씨가 기증할 수 있는 전부였다. 이 씨의 아들은 아버지를 봉안당에 모신 뒤 5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장기를 기증받은 분들이 소중하게 새 삶을 살아가시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이 씨의 가족들도 장기 기증 서약을 할 예정이라고 한다.
보건복지부 산하 한국장기기증원(KODA)에 따르면 이 씨는 지난해 500번째 뇌사 장기 기증자다. KODA가 집계를 시작한 2000년 이래 연간 500명을 기록한 것은 처음이다. 2012~2014년 장기를 기증받은 환자가 기증자 1명당 평균 4.2명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지난해 장기를 건네받은 환자의 수는 2000명 안팎일 것으로 추정된다.
KODA 홈페이지에 마련된 ‘하늘나라 편지’ 게시판에는 이 씨와 같은 기증자의 가족이나 친구가 올린 추모 글이 매달 수십 건씩 올라오고 있다. 아들의 생명나눔증서(장기기증 증서)를 묘지에 놓아두며 “짧았던 인생 중 가장 큰 보람이었기를 바란다”고 당부하는 한 아버지, 남편이 세상을 떠난 지 266시간이 됐다며 “명품 가방은 필요 없으니 혼자서 아이를 꿋꿋이 키울 수 있도록 지켜봐 달라”고 말하는 아내…. 이들이 고인에게 공통적으로 덧붙인 말은 “슬픔보다 더 큰 기쁨을 누군가에게 남기고 갔으니 편안히 눈 감아 달라”는 것이었다.
올해부터 장기와 인체조직 기증 창구가 일원화된다. 장기는 신장과 간장, 췌장, 폐, 소장, 안구 등을, 인체조직은 피부와 뼈, 연골, 인대, 혈관, 심장판막 등을 의미한다. 그동안 장기 기증은 한국장기기증원에서, 인체조직은 한국인체조직기증원에서 관리해 기증자 및 유족이 불편을 겪었다.
이에 복지부는 두 기관 간 업무협력을 본격화한다는 계획을 5일 밝혔다. 우선 장기와 인체조직 기증 의뢰 접수를 담당해온 콜센터를 통합해 ‘장기·조직 통합정보센터(1577-1458)’로 운영한다. 복지부 관계자는 “올해 상반기 중 장기, 인체조직 통합관리법 제정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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