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뜻 즉석 만남이나 불법 성매매를 제안하는 내용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마약을 판매하고 있다는 글이다. 여기서 수정은 마약의 한 종류인 필로폰을 뜻하는 은어다. 작성자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일종인 텔레그램 아이디(ID)도 함께 적어 놓았다. 이를 통해 은밀하게 마약 거래를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 글이 올라온 곳은 거의 관리되지 않고 있는 한 중소 무역 회사 홈페이지 고객 상담 게시판. 이처럼 관리되지 않거나 버려진 인터넷 사이트들이 사람들을 범죄로 이끄는 용도로 악용되고 있다. 사람 손길이 닿지 않는 빈집이나 폐가(廢家)에서 성범죄나 폭력 사건이 일어날 위험이 큰 것처럼 온라인상의 폐사이트가 각종 사이버 범죄의 온상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동아일보 취재팀이 5일 인터넷 포털에서 마약을 뜻하는 각종 은어를 검색해 본 결과 마약 판매를 알선하는 글이 올라온 폐사이트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이런 글이 올라온 곳은 주로 중소기업 홈페이지 고객 게시판이나 지방대 소규모 학과 자유게시판 등이다.
알선 글에는 휴대전화 번호를 적어 놓거나 위챗, 텔레그램 등 해외에 서버를 둬 추적이 어려운 SNS ID를 공개해 일반인도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 각종 범죄에 활용되는 대포통장을 구한다는 글 역시 검색 한 번으로 손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이런 글들을 방치하고 있는 사이트를 뒤져 발견한 연락처로 전화해 보니 아예 등록돼 있지 않은 번호인 곳도 있었다. 어렵사리 연결이 돼도 “게시판을 확인해 보지 않아 몰랐다”거나 “관리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마약 공급상 등 범죄 세력이 폐사이트를 활용하는 것은 이곳이 관리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폐사이트는 기업들이 제작 대행사를 통해 홍보용으로 만든다. 대개 홈페이지 계정을 관리하는 웹호스팅 업체에 사용료 3, 4년 치를 일괄 지급하는 식이다.
폐업이나 사명 변경 등의 이유로 회사는 사라졌는데 사이트만 남아 있는 사례도 있다. 이런 폐사이트가 얼마나 되는지에 대한 통계는 없다. 다만 연간 10만여 개가 새로 생기지만 1년 뒤에도 운영되는 곳은 1.4%에 그치는 인터넷쇼핑몰의 실태를 감안하면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찰은 포털에서 문제의 사이트를 일일이 검색하고 업체에 연락해 조사하는 식으로 폐사이트 정리에 나서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폐사이트가 범죄 알선 창구로 이용되는 것을 막으려면 사람들의 접속을 제한하거나 완전히 폐쇄해야 하지만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는 지적 때문에 강제 폐쇄도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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