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보수 엽사만 쳐다보는 ‘멧돼지와의 전쟁’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월 6일 03시 00분


서울 은평구 이틀에 한번꼴 출몰신고… “피부 두꺼워 권총으론 못잡아”
경찰, 민간 포획단 27명에 협조 요청

3일 오후 11시쯤 서울 은평구 연신내 성당 인근에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또 멧돼지 탓이었다. 1m가 넘는 멧돼지 한 마리가 나타나 휘젓고 다녔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도 날쌘 멧돼지를 제압할 방법이 없었다. 순찰차 앞 범퍼까지 들이받은 멧돼지는 자정을 넘겨 은평구립도서관 근처에서 몸을 감췄다.

서울 북한산 주택가에 멧돼지가 출현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주민들의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겨울철에 먹이를 찾으러 민가로 내려온 멧돼지가 주민들의 소란에 놀라 각종 사고로 이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경찰은 27명의 민간 엽사에게 멧돼지 포획을 의존하고 있고 지자체도 제대로 된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

은평소방서에 따르면 지난해 11, 12월 멧돼지 출현 신고가 24건에 이른다. 2일에 한 번꼴로 나타나는 셈이다. 은평뉴타운 아파트에 거주하는 정모 씨(20·여)는 “어두운 밤에 멧돼지를 만날까 봐 가족들이 귀가를 서두른다”며 “귀가가 늦을 때는 가족들이 아파트 입구까지 데리러 나온다”고 말했다.

멧돼지가 나타나도 경찰과 소방당국이 적극적으로 제압하거나 포획하기 쉽지 않다는 게 문제다. 경찰은 멧돼지 신고가 접수되면 민간 엽사로 구성된 포획단에 협조를 요청해 포획을 시도하고 있다. 은평구와 종로구 등 서울시 9개 구와 협약을 맺은 엽사는 총 27명으로 모두 각자 생업에 종사하고 있는 민간인이다. 이들은 경찰의 요청이 오면 경찰서에 보관된 엽총을 찾아 출몰 현장으로 간다. 하지만 자신의 사냥개를 끌고 출동해야 하므로 멧돼지가 나타난 뒤 상당 시간이 지나야 현장에 도착한다. 그나마 무보수라 이들에게 출동을 강제할 수도 없다.

경찰은 위급할 경우 권총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실효성은 크지 않다. 지난해 12월 동아일보 취재진과 은평구 북한산 일대에 출현한 멧돼지 포획에 동행한 ‘서울시 멧돼지 출현 방지단’ 지용선 사무국장(56)은 “성체가 된 멧돼지는 피부가 두꺼워 권총으로 잡을 수 없다. 커다란 쇠구슬 2개가 든 엽탄이 멧돼지 사냥용”이라고 설명했다.

이 지역 경찰 관계자는 “아직까지 북한산 일대 주택가에서 멧돼지가 민간인을 습격한 사례는 없어 관련 대책을 따로 세우진 못했다. 국립공원 관리 주무부처인 환경부가 나서서 북한산 주변에 펜스를 설치하는 등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반면 환경부는 “펜스 설치나 멧돼지 포획만이 능사는 아니다”며 “개체 수와 서식 상황 등을 분석해 구체적인 대응 방안을 마련할 계획”이라는 원론적 답변만 되풀이하고 있다. 은평구 역시 따로 예산을 편성해 멧돼지가 기피하는 물질을 북한산 주변에 뿌려 대응하고 있지만 효과는 미미하다. 관계 당국이 시민 안전을 위한 근본적인 예방 대책은 세우지 않고 있는 가운데 서울시와 은평구는 멧돼지 피해에 따른 보상 관련 조례만 제정할 예정이라 시민들의 멧돼지 공포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정동연 기자 call@donga.com
#멧돼지#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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