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경기]1970년대 派獨근로자 ‘생활사 유물’ 한눈에 본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월 14일 03시 00분


공구-작업복-안전모 등 300여점… 재독한인조선기술자協 기증
한국이민사박물관 전시 계획

독일 호발트조선소에서 일하던 한국인 조선기술자들. 이들은 당시 조선소에 파견돼 입었던 작업복과 각종 공구 등을 이민사박물관에 기증했다. 한국이민사박물관 제공
독일 호발트조선소에서 일하던 한국인 조선기술자들. 이들은 당시 조선소에 파견돼 입었던 작업복과 각종 공구 등을 이민사박물관에 기증했다. 한국이민사박물관 제공
1960, 70년대 독일에 광부나 간호사로 파견돼 외화를 벌어 국내로 송금해 한국 경제가 발전하는 데 전환점을 마련한 파독(派獨) 근로자들. 1963년 12월 21일 한국인 광부 1진(123명)이 김포공항에서 서독으로 가는 비행기에 오르며 시작된 근로자 파견은 독일이 중단 결정을 내린 1977년까지 1만8000여 명에 달했다. 이 중에는 조선업에 종사하던 기술자도 포함돼 있다.

인천에 있는 한국이민사박물관은 ‘재독한인조선기술자협회’가 1970년대 독일의 한 조선소에 파견돼 근무하던 한국인들이 사용했던 공구와 작업복, 안전모, 사진 등 300여 점에 이르는 유물을 기증했다고 13일 밝혔다.

박물관에 따르면 독일 함부르크에 있는 호발트조선소(HDW)는 1971, 1972년 세 차례에 걸쳐 한국인 조선기술자 약 300명과 3년간 근로계약을 체결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배상으로 영국에 돌려줄 5만 t급 컨테이너선 5척을 건조하는 데 필요한 노동자들을 모집한 것. 이들은 조선소의 인사부장과 숙련공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기능시험을 치르는 등 엄격한 선발 과정을 거쳤다.

독일에 둥지를 틀게 된 이들은 한국인 특유의 근면과 성실함을 보여 조선소 관계자는 물론이고 파견을 나온 영국 선박회사 검사관들에게도 좋은 인상을 심어줬다. 또 뛰어난 기술력도 인정받아 일부 기술자들은 선체를 조립하는 공장을 맡아 직접 운영하기도 했다. 특히 잠수함이나 해상크레인, 시추선을 건조하는 과정에서 특수용접공으로 일하던 한국인들은 인근 다른 유럽 국가에 파견될 정도였다고 한다.

이들은 당시 독일에 파견된 광부나 간호사들처럼 쉬는 날도 없이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휴가를 내도 일손이 부족한 농촌의 과수원이나 농장, 다른 공장에서 일하며 추가로 돈을 벌었다.

기본적인 생활비만 남기고 모든 돈을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송금했다. 결국 이들의 눈물겨운 노력은 1972년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가 조선소도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영국을 통해 그리스 해운회사의 26만 t급 유조선 2척을 주문받는 데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고 박물관 측은 설명했다.

이들은 대부분 계약 기간이 끝나면서 귀국한 뒤 현대중공업과 한진중공업 등에 입사해 중견 기술자로 근무하면서 독일의 선진 기술을 보급해 한국 조선업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계약이 연장돼 현지에서 재취업한 40여 명은 조선소의 특별한 배려로 한국에 다녀온 뒤 1976년 4월 ‘파독 조선 기술자 동호회’를 만들어 친목을 도모하기 시작했다. 2004년에는 재독한인조선기술자협회로 이름을 바꿨다. 하지만 한때 호황을 누렸던 독일의 조선업은 일본에 이어 한국의 부상으로 위축되기 시작했고, 현재 함부르크에는 한국인 조선기술자의 가족 31가구가 살고 있을 뿐이다.

협회는 당시 이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유물을 모으기 시작해 2014년 63점, 지난해 234점을 박물관에 기증했다. 박물관은 유물 정리 작업을 거쳐 조만간 전시할 계획이다.

신은미 한국이민사박물관장은 “한국의 조선업이 당당히 세계 1위에 오를 수 있었던 배경에는 파독 조선 기술자들의 숨은 헌신이 큰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다. 비록 파독 광부나 간호사들에 비해 숫자는 적었지만 조국의 경제 발전을 위해 이들이 노력한 사실도 제대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황금천 기자 kc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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