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의 한국 블로그]빨리빨리 대한민국, 느리게도 살고 싶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월 14일 03시 00분


이라 다문화여성연합 대표
이라 다문화여성연합 대표
새로운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의견과 조언을 주고받는 것은 항상 즐거운 일이다. 나의 대화 상대는 다문화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젊은 대학생들, 국내 이주민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하고 싶어 하는 은퇴한 어르신들, 한국 생활이 궁금한 이주민 등 다양하다. 사람에 관련된 일이라 모든 질문에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들어주고 의견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곤 한다.

지난해 만났던 50대 후반의 한 부인이 생각난다. 어느 날 모르는 분한테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한국어는 모국어가 된 느낌이지만, 한국 생활이 아직 낯설다고 한 번 만나고 싶다고 했다. 중국에서 귀국한 교포인가 싶었다. 청바지에 하늘색 셔츠를 입고 찾아 오셨다. 젊었을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30년 가까이 미국에 살았던 이야기로 대화를 시작했다. 귀국한 지 두 달 됐는데, 사람들은 그대로지만 문물이 너무 많이 바뀌어 마치 낯선 외국에 온 것 같다고 말했다.

이분께 편리하면서도 벅차고 숨찬 문화는 바로 한국 사회의 ‘속도’였다. 언제 어디서나 무엇이든지 빠르게 해야 하는 것. 그녀는 처음 한국에 와서 전화와 인터넷을 설치하려고 연락했더니 그날 바로 와서 TV를 무상으로 주면서까지 설치해준 것에 놀랐고, 신속하게 24시간 음식 배달을 해주는 세상이 있는가 싶었고, 동네 마트에서 장본 걸 집까지 배달해주는 것은 경이롭기까지 했다고 한다. 자정이 다 된 시간임에도 도심 지하철역 앞이 젊은이들로 가득한 것은 아직도 신기하다고 하면서, 그중 반 이상은 앞을 보고 걷는 게 아니라 휴대전화를 보면서 걷더라는 얘기를 들으면서 나도 긍정의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지나온 인생의 길이가 나보다 워낙 길어서 그랬는지 설명을 길게 하셨다. 눈으로 직접 보고 경험해 온 것들이 많을 테니, 하실 말씀도 많았을 것이다.

세 시간 동안 이야기를 들었다. 이야기의 결론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 좋은데, 그런데, 어딜 가든 효율적으로 빠르게 돌아가야 하는 사회가 편리하긴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는 세대들에겐 점점 숨찬 일이겠다 싶어 부담이 된다는 말이었다. 모르거나 게을러서 숨찬 것이 아니고, 조금 더 느끼고 생각해보고 싶은데 바삐 움직이는 시스템이 이를 존중해주거나 용인해주지 않는다는 뜻 같았다.

연말에 자선모금을 위한 일일찻집 행사에 참여했더니 이분과 비슷한 나이의 어느 분이 거의 비슷한 말을 했다. 사회의 모든 부분이 효율적이고 빠른 게 때론 피곤하다는 설명이었다. ‘유럽완전정복’이란 패키지 여행을 갔는데 열흘쯤 되는 기간에 7개국의 관광지를 ‘빨리빨리’ 보고 지나가야 하는 그런 느낌이라고 했다. 나이가 들면서 천천히 느긋하게 살고 싶은 사람도 꽤 많은데, 그런 목소리를 들어주는 사람들이 없다는 얘기였다.

옆에 계신 한 분이 거들었다. 서남아시아 국가에서 사업을 하는데 그 나라에서는 관청에 서류를 발급받으러 가면 가끔 인터넷이 안 된다고 했다. ‘언제 되느냐’고 물어보면 자기네들도 모른다고 대답한다. 오후에 가서 다시 허탕을 치고, 다음 날 오전에 갔더니 “이제 인터넷은 되는데 프린터 잉크가 떨어져 서류 발급이 안 된다”고 했다. 결국 미안하다고 말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를 들어야 하는 민원인들도 아무 불평 없이 되돌아 나갔다는 얘기다. 한두 번 큰소리로 불평을 했더니, 이런 얘기가 들려왔다고 한다. “저 사람 한국인이래.”

그런데 이렇게 뭐든지 시간이 걸리는 그 나라 사람들에게 그게 불편하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얘기할까? 정답은 거의 “아니다”일 것이다.

이렇게 빠르고 효율적이어야 하는 일상이 내게는 이제 익숙한 생활이 돼 버렸다. 인터넷과 컴퓨터, 그리고 스마트폰이 인간의 의사소통 구조와 방식을 바꾸고 패러다임 자체도 바꿔 가고 있는 세상이다. 사회가 빠르게 글로벌화하면서 우리의 주변 사람들도 점차 다양한 배경과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로 바뀌어 간다. 그럼에도 우리는 본능적으로 구분을 하고, 분류를 하고, 그리고 우열을 정해 등수를 매긴다. 나도 그런 사회의 ‘열성적으로 바쁜’ 구성원으로 살아오지 않았을까. 이젠 그런 다양함을 존중하면서도 다름과 느림을 인정하는 움직임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새해인 데다 아직 설날도 지나지 않았다. 한국 나이로 보면 내 두 자릿수 나이의 앞자리가 바뀌는 해다. 내일은 내 4G-LTE 스마트폰으로 ‘느리게 산다’를 검색해 책을 한 권 사 볼 예정이다.

이라 다문화여성연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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