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에서 용접공으로 일하다 수년 전 서울로 올라와 직장에 다니는 딸의 자녀들을 돌봐주던 박모 씨(65). 그는 20일 집 근처 주민센터를 찾아가 ‘지역공동체 일자리사업’(지역일자리 사업)에 지원했다. 모집 공고문에 명시된 ‘방치 자전거 정비사’로 뽑히면 아직 녹슬지 않은 실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손자들도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터라 하루 5, 6시간 일하는 건 문제없었다.
하지만 주민센터 직원은 “어르신들을 위한 사업이 따로 있다”며 다른 안내문을 건넸다. 안내문에는 ‘독거어르신 돌보미’ ‘공원관리 도우미’ 등이 적혀 있었다. 근무 시간은 일주일에 10시간 안팎, 임금도 월 20만 원에 불과했다. 박 씨는 “젊은이들 못지않게 일할 수 있는데 벌써 성치 않은 늙은이로 취급하는 것 같다”며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노인의 일자리는 ‘따로’ 있을까. 지역일자리 사업은 정부 재정을 지원하는 저소득층 일자리 사업들 중 가장 인기가 많다. 구직에 어려움을 겪는 취업 취약계층을 돕는다는 취지로 2011년 시작해 한 해 1만 개가 넘는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민간기업 재취업이 쉽지 않은 만 65세 이상 노인들의 참여 비중이 매년 30%를 웃돈다.
그런데 정부는 단계적으로 노인들의 참여를 제한하기로 했다. 행정자치부가 최근 각 지방자치단체에 보낸 2016년 사업지침에 따르면 올해는 노인 비중을 전체 선발 인원의 20% 이하로 낮추고, 2017년부터는 아예 뽑지 않기로 했다. 반대로 청년층(18∼34세) 비중은 5% 이상으로 못 박았다. 노인들에게는 대신 보건복지부에서 주관하는 ‘노인일자리 사업’으로 바꿀 것을 안내하도록 했다.
만 65세가 넘었지만 근로의욕이 강한 이들은 이런 ‘일자리 칸막이’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지역일자리 사업은 최대 주 30시간 근무에 월 임금이 많게는 92만 원으로, 단기 일자리로서 손색이 없다. 과거 경력을 활용하거나 공예, 다문화 교육 등 새로운 기술과 지식을 습득해 직업을 이어갈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한다. 반면 노인일자리 사업은 월 임금 20만 원의 ‘소일거리’에 가까운 단순직이 대부분이다. 중소기업에 다니다 퇴직한 차모 씨(67)는 “아직 일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는데 획일적인 나이 잣대로 공공 일자리 지원을 차별하는 건 불합리하다”고 말했다.
청년실업률을 조금이라도 낮추려는 ‘꼼수’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지난해 말 기준 청년실업률은 9.2%. 1999년 이후 최고 수준이다. 청년일자리 구하기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면서 노인들의 일자리 문제는 실태에 비해 제대로 부각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나 지방자치단체 정책 수립 때 노인일자리가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하지만 정부는 이미 노인일자리 사업에 대규모 예산을 쓰고 있는 만큼 조정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행자부 관계자는 “국무조정실에서 두 사업의 노인일자리 지원이 중복된다고 판단해 정리를 지시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소정 남서울대 노인복지학과 교수는 “정부 재정이 지원되는 공공일자리 사업에 대표적 취업 취약계층인 노년층을 배제하는 것은 옳지 않다”며 “유럽 등 선진국에서도 노인만 제외한 공공일자리 사업은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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