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1년전 추억 배달하는… 느린 우체통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월 26일 03시 00분


하늘공원서 엽서 한장 어떠세요

서울 마포구 상암동 하늘공원에 있는 느린 우체통. 시민들이 직접 엽서에 사연을 적은 뒤 느린 우체통에 넣으면 1년에 두 번 설과 추석에 정해진 주소지로 발송된다. 서울시 제공
서울 마포구 상암동 하늘공원에 있는 느린 우체통. 시민들이 직접 엽서에 사연을 적은 뒤 느린 우체통에 넣으면 1년에 두 번 설과 추석에 정해진 주소지로 발송된다. 서울시 제공
은색 억새밭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서울 마포구 상암동 하늘공원 정상엔 작고 빨간 우체통이 하나 있다. 부지런히 사람들 사이를 편지와 엽서로 이어주는 게 우체통의 임무일 텐데 하늘공원의 우체통은 부지런함과는 거리가 멀다. 오로지 1년에 두 번, 설과 추석에만 우체통이 열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늘공원의 우체통을 ‘느린 우체통’이라 부른다.

25일 서울시에 따르면 하늘공원 느린 우체통이 연간 처리하는 엽서는 총 120통이다. 2012년 1월 운영을 시작해 현재까지 약 500통의 엽서가 느린 우체통에 잠시 머물렀다가 수신인을 찾아갔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일상화한 시대이지만 시간을 들여 손으로 글을 쓰고 발송까지 몇 개월을 기다리는 아날로그식 소통이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이다.

느린 우체통을 통해 전해진 엽서에는 유치원생들이 시골의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보내는 그리움, 하늘공원에서 받은 느낌을 적은 시, 억새축제 기간마다 하늘공원을 방문해 한 해를 견뎌냈음을 알리는 노신사의 사연 등 시민들의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우체통 옆 탐방객 안내소에서 파는 270원짜리 관제엽서가 주로 사용된다.

느린 우체통의 가장 큰 고객은 역시 연인이다. 하늘공원을 거닌 뒤 서로에게 편지를 쓰는 연인들 사이에서 느린 우체통에 엽서를 넣는 것이 ‘성지순례’처럼 여겨진다. 티격태격하며 하늘공원에 올라도 “오늘 화내서 미안해”라는 엽서 한 장이면 화는 눈 녹듯 사라지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연인의 관계가 영원할 순 없는 법. 불가피하게 헤어졌다면 1년에 두 번 열리는 우체통의 느긋함에 속이 터질 수도 있다. 하늘공원 관계자는 “연인끼리 하늘공원을 찾아 편지를 썼는데 얼마 안 가 헤어졌다면서 편지를 찾아 찢어달라는 요청도 온다”며 “종종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느린 우체통의 ‘형제’들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서대문구는 다음 달 1일부터 구청 민원여권과에 하늘공원과 같은 느린 우체통을 설치해 운영할 예정이다. 구청에서 혼인신고와 출생신고가 이뤄진다는 데 착안한 것이다. SNS에 올리는 ‘인증샷’ 대신 혼인과 출생의 기쁨을 엽서에 담아 우체통에 넣으면 6개월이나 1년 뒤 정해진 주소로 발송해 주는 서비스다.

서대문구를 상징하는 서대문형무소 역사관과 독립문, 연세대 등이 그려진 엽서와 우편요금은 구에서 지원한다. 서대문구 관계자는 “구청에서 혼인, 출생신고를 하는 연간 1000명의 구민이 느린 우체통을 이용할 것으로 기대한다”며 “자신이 쓴 엽서가 1년 뒤 결혼한 배우자와 자녀에게 도착하는 기쁨과 설렘을 느껴보길 바란다”고 말했다.

송충현 기자 balgun@donga.com
#우체통#하늘공원#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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