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자살로 삶을 마무리한 40대 남성 A 씨의 아내 B 씨는 이 말이 ‘도와 달라’는 남편의 절실한 신호였음을 미처 몰랐다. 생각해 보면 징후는 계속 있었다. 원래 A 씨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고 다정다감했다. 하지만 사망 6개월 전부터 동창회에 나가지 않고, SNS에 글을 올리는 것도 하지 않았다. 3개월 전부터는 식사량이 줄었고 체중이 급격히 빠졌다. 늘 피곤해 했고 쉽게 짜증을 냈으며 잠을 제대로 못 잤다. 갑자기 가족 앞에서 눈물을 보이며 “고맙다”고 말했다. 그리고 A 씨는 출근길에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A 씨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 10명 중 9명(93.4%)은 생전에 자신의 상태를 드러내는 경고 신호를 보냈지만, 유가족 대부분(81%)은 이를 알아차리지 못해 적절한 도움을 주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보건복지부가 26일 ‘2015년 심리부검 결과보고회’를 통해 밝힌 내용이다. 심리부검은 자살 사망자의 유가족 및 주변인을 면담해 자살자의 심리와 상태, 행동 등을 분석하는 조사방법이다. 복지부 산하 중앙심리부검센터에서 지난해 자살 사망자 121명의 유가족 151명을 대상으로 실시했다.
그 결과 자살 사망자 121명 중 88.4%는 정신건강에 문제가 있었고, 우울증이 74.8%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이는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정신질환으로 약물치료를 받거나 정신의료기관이나 정신건강증진센터를 방문해 진료를 받은 사람은 각각 15%, 25.1%에 불과했다. 대신 복통이나 두통, 수면곤란 등을 치료하기 위해 동네 의원이나 한의원에 방문한 경우가 28.1%로 더 많았다.
특히 자살 사망자 중 23.9%는 정신건강 문제에 경제적 곤란이 겹치면서 극단적 선택을 했다. 중장년 남성에게서 주로 나타났는데, 이들은 실직이나 사업 실패 등으로 부채가 많았고 이로 인해 생전에 부부 및 가족 갈등이 잦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우리나라의 경우 자살이 음주와 밀접하게 관계돼 있다는 것도 눈여겨볼 만한 부분이다. 자살 사망자 5명 중 2명(39.7%)은 사망 당시 음주 상태였고, 4명 중 1명(25.6%)은 과한 음주로 대인관계에 갈등을 빚거나 직업을 얻지 못했으며, 2명 중 1명(53.7%)은 본인 뿐 아니라 가족도 알코올 관련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자살 예방을 위해서는 정부나 관계 기관이 과도하거나 잘못된 음주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함을 시사한다.
또 자살 사망자 4명 중 1명(28.1%)은 가족 중 자살을 시도하거나 실제로 사망한 사람이 있었다. 이는 자살 사망자 역시 한때 가족의 사망 또는 자살 시도에 힘들어했음을 암시한다. 백종우 중앙심리부검센터 부센터장은 “자살 유가족에 대한 적극적인 심리 지원 방안을 마련해야 함을 의미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유가족의 88.0%는 “(심리부검을 위한) 면담 이후 삶에 긍정적인 변화가 있었다”고 답했다. 심리부검을 통해 유가족이 고인의 죽음을 객관적, 통합적으로 바라보게 되면서 막연한 죄책감과 자기 비난에서 벗어나 건강한 애도를 할 수 있었다는 것.
차전경 복지부 정신건강정책과장은 “심리부검을 확대 실시해 자살 원인을 면밀히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세심한 자살 예방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복지부는 2월 중 범부처 차원의 정신건강증진종합대책을 수립해 발표할 예정이다.
한편, 아래와 같은 자살 경고 신호를 보내는 사람이 있다면 정신건강증진센터(1577-0199)로 연락해 도움을 요청하도록 한다.
◇자살 사망자의 ‘경고 신호’
<언어>
-죽음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 -신체적 불편함 호소 -자살방법에 대한 언급 -사후세계를 동경하는 표현 -주변 사망자에 대한 그리움 표현 -편지나 일기장 등에 죽음 관련 내용 기재
<행동>
-잠을 제대로 못자고 식욕이 떨어지며 살이 빠짐 -현금을 인출해 가족에게 주는 등 신변 정리 -가족과 특별한 시간을 보내려고 하는 등 평소와 다른 행동 -외모 관리에 무관심 -급격한 음주 및 흡연 -자살 관련 기사 등 정독 -가족, 지인에게 평소 하지 않던 고마움과 미안함을 표현 -집중력이 떨어지고 업무처리에 실수가 많아짐
<정서>
-갑작스럽게 울거나, 평소 웃지 않고, 말이 없어짐 -무기력증, 대인기피, 흥미 상실 *자료 : 중앙심리부검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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