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여행에서 돌아오면 후회가 남을 때가 있다. 일본 시즈오카(靜岡) 현 하마마쓰(濱松) 시의 ‘액트 시티(Act City)’가 그랬다. 그곳은 콘서트홀과 악기박물관, 호텔과 컨벤션센터가 함께 들어 있는 42층짜리 복합 공간. 나는 취재 중에 그냥 지나쳤다. 관심이 없어서였는데, 그래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 피아니스트 조성진(22)의 바르샤바 쇼팽 국제피아노콩쿠르 우승 소식이 나의 실수를 깨우쳐 준 계기다.
그의 연주 CD가 발매되던 날 한국의 음반가게엔 긴 줄이 생겼다. 그중엔 나도 있었다. 그리고 음반 속의 설명서를 읽던 중 한숨을 쉬었다. ‘2009년 하마마쓰 국제피아노콩쿠르에서 우승하고’라는 대목에서다.
액트 시티의 콘서트홀. 조성진의 무한한 가능성을 세상에 알린 첫 우승 무대였다. 그런 만큼 하마마쓰 시민을 위한 음악의 전당 액트 시티 콘서트홀은 우리도 기억할 만한 곳이다. 그런데 그걸 모르고 지나쳤으니…. ‘아는 만큼만 보인다’는 격언을 곱씹었다.
세상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 하마마쓰 국제피아노경연대회가 바르샤바 쇼팽 국제피아노콩쿠르의 전초전이자 전 세계 피아니스트의 등용문으로 우뚝 선 데도 이유가 있다. 야마하(YAMAHA) 가와이(KAWAI) 스즈키(SUZUKI), 이 세 향토기업이 모두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놀랍지 않은가. 세계 굴지의 악기 브랜드가 모두 이 하마마쓰에서 창업했다는 것이.
시작은 야마하다. 창업자 야마하 도라쿠스(1851∼1916)는 오사카에서 시계상점 기술자로 일하던 중 하마마쓰의 병원에 출장을 가게 됐다. 그러고 거기서 한 초등학교의 오르간 수리를 부탁받았다. 그는 솜씨 좋게 부품을 만들고 끼워 제소리가 나게 했다. 그게 하마마쓰에 오르간수리업소를 차리게 된 계기였다. 악기와 오토바이의 세계적 브랜드 야마하는 이렇게 시작됐다.
당시 야마하 오르간수리소엔 157cm 단구의 기술자가 있었다. 열한 살 때부터 일해 온 가와이 고이치(1886∼1955). 그는 야마하가 죽고 노사분규가 일자 어쩔 수 없이 회사를 나와 가와이 악기연구소를 창업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28년 그랜드피아노를 생산하며 ‘가와이’ 피아노를 세계적 브랜드로 키웠다. 그는 1951년 블루리본(글로벌 최고 브랜드의 상징)을 받자 그걸 야마하 도라쿠스의 무덤에 바쳤다.
스즈키는 1953년 이래 교육용 악기시장의 세계 최강자다. 그 이름은 ‘모노즈쿠리(물건 만들기)의 화신’으로 불리는 스즈키 미치오(1887∼1982)에서 나왔다. 스즈키는 1920, 30년대에 직조기 개량과 자동화로 일본 방직산업을 혁신한 천부적 기술자. 이후 오토바이와 자동차 제작까지 사업 분야를 넓혔는데 이 역시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다.
그렇다. 하마마쓰 콩쿠르가 조성진, 임동혁(1996년 2위)을 배출하며 쇼팽콩쿠르의 전초전으로 권위를 얻게 된 것은 바로 이런 유산 덕분이다. 하지만 그것도 시민의 열정과 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마마쓰 시민들은 1979년부터 지역의 자랑인 악기산업을 돕기 위해 노력해왔다. 시민 취주악단 경연대회를 열고 학생들에겐 음악 감상을 생활화하도록 했다. 1991년에 시작한 ‘하마마쓰 국제피아노경연대회’도 그중 하나. 지금까지 젊은 예술가 2만645명에게 무대를 제공했다. 액트 시티는 그런 다양한 행사(시즈오카 국제오페라콩쿠르, 하마마쓰 세계청소년음악회·취주악대회 등)를 지원하는 문화의 젖줄이다. 하마마쓰는 2014년 유네스코 창의도시(음악)로 선정됐다.
그 하마마쓰를 통영시가 벤치마킹 중이다. 경남 통영은 윤이상의 고향으로 윤이상음악제를 열고 있는 만큼 하마마쓰가 부러웠을 것이다. 그런데 거듭 강조하거니와 진정 배워야 할 것은 액트 시티 같은 시설이나 콩쿠르 같은 이벤트가 아니다. 시민의 열정과 참여다. 모든 시민이 함께 즐기는 ‘야라마이카 뮤직페스티벌’과 취주악대 거리콘서트, 하마마쓰 역 앞에 전시한 가와이 그랜드피아노, 하마마쓰 공식캐릭터 ‘도쿠가와 이에야스(에도 막부의 개조)’의 옷에 들어있는 피아노건반 무늬, 공무원 명함에 새긴 그 캐릭터, 하모니카를 연상시키는 액트 시티 빌딩 디자인 등등. 이 모든 것은 시민들이 음악도시 하마마쓰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를 웅변한다. 음악도시라면 당연히 음악이 살아 숨쉬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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