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4년 국세청 통계에 따르면 한국인들의 기부 총액은 연간 13조 원에 이른다. 한국인 특유의 에너지와 정(情)은 남을 돕는 데도 아낌이 없다. 해가 갈수록 기부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이성(理性)보다는 감성(感性)에 좌우되는 경향이 강하다. 기부가 크리스마스 시즌을 전후한 연말과 새해, 대형 사고가 났을 때 집중되는 것은 물론이고, 감성을 자극하는 마케팅에 약한 모습을 보인다. 자신의 관심 분야에 따라 특정 단체에 정기적으로 기부하는 모습이 흔한 외국의 사례와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
○ ‘감성 마케팅’에 약한 한국의 기부문화
2000년대 중반부터 TV광고를 통해 쉽게 접할 수 있었던 모금 광고는 이런 전개 방식을 보인다. 우선 파리가 얼굴에 덕지덕지 붙거나 굶주림으로 핏기 없는 얼굴을 한 앙상한 아프리카 어린이가 화면에 등장한다. “죽기 위해 태어나는 아이가 있을까요? 매일 1만9000여 명의 아이가, 5초마다 한 아이가 지금도 헛되이 죽어 가고 있습니다.” 잔잔한 배경음악이 깔리고 책망어린 내레이션이 이어진다. “이 아이를 기억하지 마세요…. 어차피 세상을 떠날 아이니까요”로 시작해 “당신의 나눔만이 이 꺼져 가는 생명을 구할 수 있다”는 메시지로 끝난다.
김춘식 한국외국어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가 2012년 9월부터 2013년 8월까지 아프리카를 소재로 한 17편의 광고를 분석해 보니 한국의 기부 광고는 크게 4가지 유형이었다. △특정인의 가정사나 비극적 스토리를 짧은 영상에 담아 풀어내는 일화적 스토리텔링 △기부로 달라진 밝은 모습보다는 현재의 비참한 영상 공개 △죽음의 빈도를 초와 분으로 환산하는 자극적인 계산법 △시청자들에게 지나친 윤리적 책임의식 강요 등이다.
개인 기부 모금액을 기준으로 2015년 상위 50위권 안에 든 기부 단체들도 비슷한 방식의 감성 광고를 많이 했다. 김 교수는 “사람들에게 심적 고통을 주는 방식의 광고가 많고 죄책감을 자극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과정에서 아프리카를 미개하고 못 사는 곳이란 편견을 가지기도 쉽다.
아동 관련 단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병원에서 치료받는 고통스러운 아기 얼굴 사진을 올리고 부모의 힘든 경제 상황을 낱낱이 공개한다. 목표 모금액을 막대그래프로 그린 뒤 돈이 들어온 만큼 눈금을 시시각각 올린다. 시각적으로 보여 주고 모금을 독려한다는 뜻이지만 이 차이가 클수록 보는 사람들의 마음은 불편해진다.
기부 단체들은 “우리도 어쩔 수 없다”고 항변한다. 기부 단체 관계자 A 씨는 “우리나라 기부자들은 감정과 동정심에 따른 후원이 많고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진을 많이 쓰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 기부 액수가 큰 격차가 난다”고 말했다.
기부 선진국에서는 아동 인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이유로 자극적인 사진은 거의 쓰지 않는다. 모금액을 어떻게 썼는지 속속들이 이해하기 쉽게 자료를 만들고, 권위 있는 감사기관의 보고서를 공개하는 ‘이성 기부’에 앞장선다. 정무성 숭실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기부 단체는 정확한 성과를 전달해야 하고 기부자들도 합리적으로 정보를 알아보고 선택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 연예인의 기부 영향력 대폭 커져
감성에 약하고 즉흥적인 경향이 있는 한국의 기부문화는 연예인들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특히 2008년 12월을 기점으로 연예인들의 선행 소식이 많이 소개됐다. 이 시기 상위 10개 기부 연관어를 살펴보면 김장훈, 문근영, 동방신기, 유재석, 현영, 정혜영 등 연예인 이름이 포함돼 있다. 기업인들의 이름도 20년간 꾸준히 오르긴 했지만 인물로 분석할 경우 2008년 이후 전체 상위 70%를 연예인이 차지했다.
기부와 함께 가장 많이 언급된 연예인은 유재석이다. 동아일보와 인사이터가 2008년 1월부터 2015년 11월까지 작성된 기부 관련 SNS 글 650만여 건을 수집해 분석한 결과 유재석의 언급량은 85만7167건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됐다. 2위는 41만8076건의 가수 김장훈이다. 두 사람 모두 ‘유재석, 위안부 피해자들 위해 4000만 원 기부’, ‘김장훈, 기부 숨기고 독도 알리고’ 등과 같이 기부 활동을 소개하는 기사와 함께 언급된 사례가 많았다. 남성전 인사이터 대표는 “기사에 연예인 선행 소식이 나오면 일반인들이 SNS에 전파하면서 기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선순환’이 이뤄졌다”고 분석했다.
연예인의 영향력이 워낙 크다 보니 기부 단체들도 유명인 홍보대사를 모시거나 이들의 도움을 얻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다. 실제로 김혜자(월드비전), 안성기, 김혜수, 소녀시대 윤아(이상 유니세프), 차인표 신애라 부부(컴패션), 션 정혜영 부부(푸르메재단)는 모두 큰 성과를 냈다.
그러나 유명 홍보대사를 내세우는 곳들에만 모금액이 집중될 경우 내실 있는 지역 풀뿌리 단체들에는 기회가 돌아가기 어렵다는 우려도 나온다. 박두준 한국가이드스타 사무총장은 “기부자들도 어느 단체가 일을 잘하는지 비교하고 투자하는 주주 같은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 ‘어린이’에 기부 몰려… 관련단체만 급속 성장 ▼
한파로 전국이 냉동고처럼 꽁꽁 얼어붙은 20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역 지하 보도. 입구마다 기부단체들이 간이 부스를 설치했다. “스티커 하나만 붙여주고 가세요.” 모금활동가들의 간곡한 부탁에 40대 여성이 발길을 멈췄다. 패널에는 ‘더러운 물을 먹어서는 안 되는 이유’라는 질문과 보기 4개가 적혀 있었다. 이들은 힘들게 살아가는 제3세계 아이들의 사진을 한 장 한 장 보여주면서 마지막으로 “하루 700원, 800원으로 이 아이들을 살릴 수 있다”며 정기후원 신청서를 내밀었다. 적지 않은 행인들이 월 3만∼7만 원씩 자동이체 후원을 약정했다.
한국인의 기부는 유독 어린이에게 집중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8년 1월부터 2015년 11월까지 작성된 기부 관련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글 650만 건 중 ‘어린이’(아동, 아이 포함)를 언급한 것이 31만8755건이었다. ‘장애인’(3만4927건)이나 ‘노인’(2만9463건)의 10배에 육박하는 수치다.
실제 어린이 관련 단체의 모금액도 크게 늘었다. 국세청에 공시된 2008년과 2014년 개인 기부금 모금액을 비교해 보면 이 기간 아이들과미래는 20억 원에서 109억 원으로 445% 성장했다. 이어 세이브더칠드런(354%)과 유니세프(330%), 한국컴패션(308%)도 300% 이상의 성장률을 보였으며 월드비전(155%) 초록우산어린이재단(104%)도 모금액이 2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기부 관련 SNS 글에서 어린이에 이어 많은 키워드는 ‘이웃’(9만1531건) ‘학생’(4만5272건) 등이었다.
※기부 연관어 변화 더 궁금하다면
스마트폰으로 QR코드를 읽으면 20년간 기부와 관련된 주요 연관어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더 자세히 알아볼 수 있다. 컴퓨터 사용자는 구글 크롬을 통해 사이트(donga.insighter.co.kr)에 접속하면 된다. 분석에 사용된 한국언론진흥재단의 뉴스빅데이터는 2월 ‘빅카인즈(BIG Kinds)’란 이름으로 일반에도 공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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