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신문과 TV에서는 32년 만의 폭설로 난민촌이 된 제주공항의 모습이 크게 보도됐습니다. 도떼기시장 같았던 공항은 충분히 알려졌으니 여기서는 조금 다른 시각에서 이 사고를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폭설로 제주공항이 폐쇄된 23일부터 기자들이 찍은 사진과 영상을 다시 한 번 찬찬히 봤습니다. 관광객 수천 명은 졸지에 노숙인이 돼 신발 벗고 포장용 박스에 누워 발광다이오드(LED) 전등 아래 잠을 청하고 있습니다. 화난 중국인 관광객은 이리저리 고성을 지르며 의자를 패대기칩니다. 전기가 부족했던 사람들은 화장실 비데 코드를 뽑고는 변기에 앉아서 스마트폰을 충전합니다.
그런데 조금만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 기록물에는 일정한 경향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 대다수는 아저씨 아니면 아주머니이거나, 노인 또는 아이들입니다. 운항이 재개됐던 25일까지 시간 순으로 보면 이런 경향은 뚜렷해집니다. 도대체 청년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보면 이들이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공항이 폐쇄된 첫날, 청년들은 누구 못지않게 당황했습니다. 그리고 어렵게 취직해 입사한 지 몇 년 되지도 않은 직장에 급히 전화를 걸었을 겁니다. “부장님, 제가 지금 눈 때문에 제주도에 갇혔습니다. 빨리 회사 가서 일해야 하는데 본의 아니게 제가 내일도, 아마 모레도 출근을 못할 것 같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인스타그램에는 북적이는 제주공항 사진과 함께 ‘아침에 회사에 전화해서 휴가를 연장했다’는 글들이 올라왔습니다.
그랬던 이들도 하루 이틀이 지나자 점점 포기하는 듯 보였습니다. 쫄깃했던 심장도 좀 풀어진 모습이었습니다. 인스타그램 아이디 kyo***는 비어 있는 한라산 소주병들을 배경으로 친구들과 찍은 사진과 함께 ‘회사 잘려도 뭐…. 자르라지. 그럼 난 그만두련다. 그래도 오늘을 즐길래’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90_10**은 ‘공항은 난리라는데 그저 재밌지 신나지. 걱정은 내일 공항에서’라고 썼습니다. iam**은 눈밭을 구르는 영상을 올리며 ‘마음을 비우면 행복해짐. 모르겠다. 즐기자그램’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이 시대 청년 직딩(직장인)의 ‘웃픈’(‘웃기다’와 ‘슬프다’의 합성어) 자화상을 봤습니다. 회사 규모를 막론하고 막내급 신참 직딩들이 어찌 감히 장기 휴가를 낼 수 있을까요. 한국 직장인의 평균 휴가 사용률은 46.4%(2013년 기준·한국문화관광연구원)에 불과합니다. 상사가 2, 3일씩 휴가를 쓰는 상황에서 최대 피해자는 막내들입니다. 하지만 천재지변이라면 가능했습니다.
뜻밖의 강제 휴가에 청년 직딩들은 쾌재를 불렀습니다. 자발적 난민이 되어 눈 내리는 제주를 실컷 즐겼습니다. 비록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겠지만 이들에게는 빡빡한 일상 속 소소한 일탈이었을 것입니다. SNS에서는 ‘잊지 못할 추억’이라며 돌하르방 눈사람 사진과 썰매를 타며 행복해하는 20, 30대 청년들의 사진이 올라왔습니다. 공항 밖 제주는 꽤 낭만적이었습니다.
웃픈 이야기는 또 있습니다. ‘낭만의 섬’ 제주인 만큼 불륜 커플도 많았나 봅니다. 특히 사내 불륜이 많이 들통 났다는 소문도 떠돕니다. 이들은 제주 폭설이 이혼의 서막이 될 줄 몰랐을 겁니다. 페이스북 등 여러 SNS에 떠돌아다녔던 이 글은 ‘좋아요’ 수천 개를 얻었습니다.
“우리 친구 마누라 토요일에 친구들과 북한산 등산 간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까 제주도로 당일치기 갔는데 못 오고 있답니다. 남편한테 거짓말하고 애인과 간 겁니다. 지금 이혼서류 준비하고 있답니다. 불륜들 제주도에서 똥줄 타고 있답니다.”
‘불륜자들…알리바이도 안 먹힐 시간대이지만 그래도 침착하게 대처해주길 바란다. 몸으로 곡소리 나게 얻어터지든지…아니면 집 가지 말고 밖에서 이혼서류 정리하든지….’
27일 새벽을 끝으로 제주공항 임시편 운항은 종료됐습니다. 7만3100여 명의 제주표류기는 이렇게 마무리됐습니다. 이제 제주에서 있었던 일은 제주에 묻어야겠지요. 열심히 논 당신, 뭍으로 일터로 가정으로 돌아올 준비 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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