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파가 몰아친 2일 전북 정읍시 전주지검 정읍지청을 마주보고 있는 단층짜리 건물을 찾았다. 1997년 ‘이태원 살인사건’의 수사를 맡아 에드워드 리(37)를 진범으로 지목해 기소했던 박재오 전 검사(58·사법연수원 22기)의 변호사 사무실이다. 사건 발생 19년 만에 아서 패터슨(37)이 진범으로 유죄를 선고받자 박 변호사에게 비난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도 무언가 할 말이 있을 터였다.
아침부터 기다린 끝에 오후 2시쯤에야 박 변호사를 만날 수 있었다. 기자임을 밝히자 그는 “할 말이 없다”며 입을 꾹 닫았다. 긴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다 그는 “20년이 지나서 다 잊었습니다. 더 이상 상기시키지 마세요. 다 잊고 싶고, 다 잊었으니까”라며 뛰쳐나갔다.
박 변호사를 쫓아 30분간 정읍 신시가지 골목을 누볐다. 틈틈이 “1심 선고를 봤느냐?”는 등의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그는 일절 답하지 않았다. “왜 둘을 공범으로 기소하지 않았나” “억울하지는 않으냐”는 물음에는 발걸음을 잠깐 멈췄지만 역시 입을 열지 않았다.
박 변호사의 집 앞에 도착했을 때 그의 부인과 마주쳤다. 박 변호사는 집으로 들어가 버렸지만 자초지종을 들은 부인이 인근 식당으로 기자를 데리고 가 그간의 소회를 털어놓았다.
이태원 살인사건을 겪은 뒤 2000년 사직한 박 변호사는 명상에 심취하며 채식을 해왔다. 육류는 물론이고 유제품, 달걀도 완전히 끊었다. 부인은 “그렇게 15년을 살다 보니 삶도 많이 달라졌다”고 운을 뗀 뒤 ‘그 사건’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남편은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후회하지도, 억울해하지도 않기로 했어요. 하지만 엄청난 에너지를 쏟았던 만큼 지금도 트라우마가 남았죠.”
지난달 29일 1심 판결이 났을 때 부부는 함께 뉴스를 지켜봤다. 부인은 “리와 패터슨 둘 중 한 명이 범인인 건 확실하고, 누군가를 진범으로 기소하는 데는 검사로서 엄청난 결단과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라고 했다. 수도 없이 날을 새웠고 보존이 안 된 현장, “기억나지 않는다”는 증인들의 진술 번복 속에 고뇌했던 남편을 안쓰러워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박 변호사는 리를 기소했다. 패터슨을 진범으로 지목한 미군범죄수사대(CID)나, 둘을 공범으로 판단해 사건을 검찰에 송치한 서울 용산경찰서와 다른 결론을 내렸다. 리에게서 거짓 반응이 나온 거짓말탐지기 결과와 체구가 큰 사람이 피해자 조중필 씨(당시 22세)를 제압하기 쉬웠을 거라는 부검의(醫) 소견이 결정적 근거가 됐다.
평소 집에서 바깥일을 말하지 않던 그였지만 사건 당시에는 자주 고민을 털어놨다. 부인은 “자기를 보호하려면 얼마든지 피해갈 수 있었는데 남편은 정면 돌파했다”고 했다. 부인은 수사권을 놓고 한미 외교문제로 비화됐던 상황, 리의 대법원 무죄 판결 이후 남편이 정신건강의학과 치료까지 받았던 사실도 어렵게 얘기했다. 수사 중 고뇌도, 무거운 책임의 무게도 오로지 검사의 몫이었다.
‘양심에 따라 수사했지만 한 사람의 인생이 걸린 문제인데 거리낌 없이 계속 일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피해자 가족들의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할까’ 등 박 변호사는 한동안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며 스스로를 괴롭혔다고 한다. 부인은 “이젠 남편도 어느 정도 마음을 정리했는데 영화감독이 찾아오고, 기자들이 물으며 상처를 헤집어서 힘들어한다. 대인기피증에도 시달린다”고 전했다.
퇴직 당시 변호사 개업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그였지만 가게 보증문제로 가세가 기운 모친을 돌보기 위해 변호사가 됐다. 박 변호사는 부검을 가장 많이 했던 검사로, 의리 있고 열정 넘치는 검사로 이름이 나 ‘서초동’에서 같이 일하자는 제의도 많이 받았지만 뿌리쳤다. 고향에 내려와 변호사 업무 외에 유기견 보호, 채식주의 강의, 소년범죄 예방 등 다양한 활동을 하던 그는 현재 건강이 좋지 않아 대외활동을 자제하고 있다.
“범인은 알렉스(극중 에드워드 리)다. 넌 범인이 아니지만 네겐 너무 많은 흠이 있지.” 2009년 9월 개봉한 동명 영화 속 박 검사는 패터슨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흠이 많고 틈이 많아 모두에게 상처가 된 사건. 박 변호사에게 묻고 싶었지만 더는 직접 들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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