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수호천사’ 천노엘 신부 59년만에 한국인 됐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2월 11일 03시 00분


아일랜드 출신… 1957년 광주 부임… 장애인 인권 향상 위해 평생 헌신
설날 앞두고 한국 국적 취득… “한국인으로 장애우 돌보며 살 것”

법무부로부터 특별귀화 허가를 받은 천노엘 신부(왼쪽)가 5일 윤장현 광주시장과 함께 ‘국적증서’를 펼쳐 보이고 있다. 광주시 제공
법무부로부터 특별귀화 허가를 받은 천노엘 신부(왼쪽)가 5일 윤장현 광주시장과 함께 ‘국적증서’를 펼쳐 보이고 있다. 광주시 제공
‘장애인의 수호천사’로 불리는 천노엘(본명 오네일 패트릭 노엘·84) 신부는 설날을 앞두고 큰 선물을 받았다. 4일 법무부로부터 국적증서를 받아 법적으로 진짜 한국인이 됐기 때문이다. 한국에 온 지 59년 만이다.

10일 광주시에 따르면 천 신부는 5일 오후 국적 취득 후 첫 외부 일정으로 광주시청을 찾았다. 광주시청 3층 접견실에서 윤장현 시장을 만난 천 신부는 “장애우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 사랑과 나눔의 문화가 정착돼 더욱 따듯한 사회가 되도록 노력하겠다”며 “한국인으로서 생을 마칠 때까지 봉사하며 살겠다”고 말했다. 윤 시장은 “(특별귀화는) 평생을 장애인 인권 향상에 노력한 데 대한 당연한 결정”이라며 덕담을 건넸다.

국적법은 2012년부터 ‘대한민국에 특별한 공로가 있는 외국인’에게 특별귀화를 허가하고 있다. 이 규정으로 인요한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57) 등 5명의 외국인이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했다.

아일랜드의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천 신부는 5세 무렵 한 선교사가 나병 환자촌에서 봉사하는 모습을 담은 영화를 보고 사제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1956년 사제가 된 이듬해 광주에 왔다. 한국 땅을 밟을 당시만 해도 이렇게 오랜 세월 광주와 인연을 맺게 될 줄은 몰랐다. 천 신부가 본격적으로 장애인 사목 활동에 뛰어들게 된 계기는 알고 지내던 한 19세 여성 장애인의 죽음 때문이었다. 병원 측은 연고자가 없는 그녀의 장례식을 치러줄 테니 해부용으로 시신을 기증해 달라고 했다.

천 신부는 단호히 거절했다. 세상에 살았을 때도 대접받지 못했는데 죽어서라도 인간다운 대접을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를 교회 묘지에 묻고 묘비문을 썼다. ‘나를 용서해주시렵니까, 사회를 용서해주시렵니까, 교회를 용서해주시렵니까. 나는 긴긴 생활 당신을 외면했습니다’는 말은 천 신부의 평생 금언이 되었다.

그는 1981년 국내 최초로 지적장애인과 봉사자가 함께 생활하는 소규모 가족형 거주시설인 ‘그룹홈’을 만들었다. 장애아 수용시설과 달리 일반 가정집에서 살며 사회 적응 훈련을 하는 곳이다. 그룹홈은 장애인의 사회성을 키워주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천 신부는 1985년 모국의 성골롬반 외방선교회 등의 도움으로 광주 북구에 엠마우스 복지관을 세웠다. 이후 엠마우스일터, 엠마우스보호작업장, 주간보호센터 등 9개 시설을 개설했다. 작업 활동을 통해 중증 장애인에 대한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다. 그는 이 시설들을 아우르는 사회복지법인 무지개공동회 대표를 맡고 있다. 장애인 풋살축구단을 창단해 장애인 풋살대회를 열어온 지도 올해로 15년째다.

그는 60년 가까이 장애인들의 든든한 울타리 역할을 하면서 장애인을 ‘봉사의 대상’이 아닌 ‘함께 살아가는 가족’으로 대했다. 1997년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가 ‘장애인 인권상’ 첫 수상자로 결정했을 때도 이 같은 이유로 수상을 거절하기도 했다. ‘공동체 커뮤니티’를 강조해온 그는 장애인뿐만 아니라 외국인 노동자, 혼혈아 등 ‘주변인’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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