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오후 경기 수원시 수원역 근처의 한 숙박업소 앞. 단체버스에서 내린 중국인 관광객 쑨하오(孫浩·33) 씨의 눈에 제일 먼저 붉은 조명이 켜진 작은 점포가 들어왔다. 안에는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성 2, 3명이 앉아 있었다. 여성들은 이따금 지나가는 남성들에게 유리문을 열고 말을 걸기도 했다. 한국에선 처음 보는 광경이었지만 쑨 씨는 이곳이 성매매업소임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쑨 씨 부부 등 중국인 단체관광객 20여 명은 민망한 표정을 감추며 성매매업소 바로 옆에 있는 한 모텔로 들어섰다. 쑨 씨는 “숙소가 이런 곳에 있다는 얘기를 전혀 듣지 못했다”며 “가족들과 함께 온 관광객이 대부분인데 이해할 수 없다”고 혀를 끌끌 찼다.
○ ‘제 살 깎는’ 저가 관광
중국인 관광객(遊客·유커)을 대상으로 한 일부 저가 단체관광의 질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열악한 식사나 숙박은 물론이고 쇼핑을 강요하는 관행이 도를 넘어서면서 관광 만족도 추락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설 연휴 직전 동아일보·채널A 취재팀이 유커들로 붐비는 서울 마포의 한 화장품 전문매장에 들어서자 매장 직원은 “특가 상품”이라며 여성 화장품 5종 세트를 홍보하기 시작했다. 관광객을 이끌고 간 가이드는 마치 매장의 직원처럼 옆에서 부연설명을 하며 화장품 구입을 종용했다. 관광객 장왕(張網·19·여) 씨는 “아무리 단체 일정이지만 별 관심도 없는 매장에 끌려 다니는 건 내가 원했던 관광이 아니다”라며 “가이드가 ‘안 사면 안 된다’는 식으로 강요해 매우 불쾌했다”고 밝혔다.
2013년 10월부터 저가 단체관광상품의 폐해를 막고 자국 관광객의 권한을 보호하기 위한 중국의 ‘여유법(旅遊法·관광진흥법)’이 시행됐지만 국내 관광업계 관계자들은 전혀 바뀐 게 없다고 입을 모았다. 문화체육관광부도 3월 초까지 전체 유치 실적 중 저가관광 비중이 높은 업체를 대상으로 중국 전담 여행사 자격을 취소할 예정이라고 밝혔지만 현장 반응은 회의적이다. 여전히 대부분의 여행사는 공식 일정 중 최소 1, 2일을 ‘김치체험관∼고려인삼매장∼화장품 전문매장∼면세점’ 등의 쇼핑 코스로 채우고 있다. 가이드 이모 씨(42)는 “여유법 시행 이후 잠시 쇼핑이 움츠러들었지만 몇 개월 지나 다시 쇼핑투어가 살아났다”고 비꼬았다.
○ 쇼핑 수수료로 적자 메우는 여행사들
한국 단체관광의 질적 하락은 관광객 모집 단계부터 적잖은 손실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정상대로면 현지에서 관광객을 모집한 중국 여행사가 일정 비용을 국내 여행사에 지급해야 한다. 그러나 국내에서의 ‘출혈 경쟁’ 탓에 도리어 한국 여행사가 중국 여행사에 수수료를 주고 있다. 여행업계 사이에 ‘인두세(人頭稅)’로 불리는 수수료는 최근 1인당 300∼500위안(약 5만5000∼9만 원)에 이른다.
가이드 김남수 씨(54)는 “애초에 손해를 보고 시작하니 실제로 관광객을 모아도 적자를 보는 경우가 많다”며 “국내 여행사와 가이드는 관광객의 쇼핑 수수료로 수익을 만들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지정 매장들은 판매금액의 약 7∼10%의 수수료를 여행사에, 약 2%의 수수료를 가이드에게 지급한다. 이 과정에서 여행사는 가이드에게 관광객 1인당 특정 금액 이상의 판매목표량을 설정하고 이를 달성하지 못하면 위약금을 받는다. 한 전직 가이드는 “보통 30명 단위 유커 1팀당 1500만 원어치를 팔아야 한다. 1인당 50만 원 이상 팔아야 하는 셈이다. 이 목표를 채우지 못하면 가이드가 1인당 2만 원의 위약금을 내야 한다”고 털어놨다.
악순환이 계속되자 일부 가이드들은 ‘한국관광 정상화 운동본부’를 만든 뒤 지난달 21일 국가권익위원회에 잘못된 관광업계 관행을 없애 달라는 진정서를 제출했다. 또 11일에는 감사원에 같은 취지의 진정서를 제출할 예정이다. 장병권 호원대 호텔관광학부 교수는 “저가관광을 일시에 뿌리 뽑기는 어렵지만 정부가 관광상품의 품질인증을 강화하고 문제가 되는 업체의 처벌 및 단속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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