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에게 도움 줘야할 땐 무관심을 꺼버려요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2월 15일 18시 2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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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사진과 물건을 정리하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받은 생활통지표를 찾았다. 한 글자 한 글자마다 선생님의 사랑이 듬뿍 묻어나는 통지표를 읽으니 마치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자라면서 많이 변했다고 생각했는데, 본래 가진 성격 중 변하지 않은 것도 많았다. 요즘도 적극적이라는 소리를 많이 듣는데, 25년 전 담임선생님께서도 사교성과 적극성을 나의 장점으로 꼽았다. 피로를 잘 느끼니 건강관리에 힘쓰라는 선생님의 당부를 지키지 못한 탓인지, 여전히 조금만 무리하면 골골거리고 있다.

변한 것도 있다. 선생님이 본 여덟 살의 나는 ‘다른 사람 일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되도록 ‘다른 사람 일에 신경을 끄고 살려는’ 사람이 되었다. 얼마 전 떠올리기만 해도 부끄러운 일이 있었다. 외근을 마치고 회사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늦은 오후 시간이어서인지 그 날따라 인적이 드물었다. 건널목 앞에서 신호가 바뀌기만 기다리고 서 있을 때였다. 내 또래의 여성이 건널목 쪽으로 바삐 걸음을 옮기다 갑자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처음에는 술에 취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좀 이상했다.

신호는 진작 바뀌었지만, 나는 횡단보도를 건너지 못했다. 그렇다고 쓰러진 사람에게 다가가지도 못했다. 겁도 나고, 괜히 남의 일에 끼어들었다가 귀찮아질까 걱정되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갑자기 자동차 경적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저기 쓰러진 사람 좀 도와줘요.” 근처를 지나던 택시기사 분이 창문을 내린 채 나를 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119에 신고를 하고, 쓰러진 사람의 상태를 살폈다. 길을 지나던 다른 남자분도 합세했다. 쓰러진 여성은 갑자기 손발이 마비되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다행히 마비가 풀리는 것 같다고 했지만, 여전히 온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코트로 다리 부분을 덮어주려는데, 금세 구급차가 도착했다. 쓰러진 사람이 의식이 있는 상태라 상황 확인도 빨리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근처 병원 응급실로 향하는 구급차를 보며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어쩌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곁에 있는데도 바로 손을 내밀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나보다 훨씬 어린 초등학생이 심폐소생술로 쓰러진 사람을 구했다는 뉴스를 보았다. 아무 것도 계산하지 않고, 배운 대로 행동하는 그들을 보면 더 오래 살았다고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건 아닌 것 같다.

예전에는 가족, 이웃, 친구는 물론 동네 떠돌이 개에도 관심이 있는 아이였는데, 어른이 되며 나만 아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자라면서 받았던 몇 번의 상처로 관심이 남들에게 부담으로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친한 친구 두 명이 크게 싸워 화해를 시키려다 더 큰 싸움으로 번지기도 했고, 후배를 생각해서 했던 조언을 잔소리로만 느끼고 있다는 것도 알고 혼자 상처 받은 일도 있었다. 나 하나 제대로 살기도 어려운 데다 상대가 나의 관심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니 차라리 매사에 무관심한 사람이 되는 쪽이 현명한 선택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 일을 겪으며,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다. 위기에 처한 사람도 못 본 척하고 싶은 마음을 가질 바에야 차라리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 되는 게 나은 것 같다. 생각해보면 나도 여러 사람이 보내준 크고 작은 관심의 도움을 여러 번 받았다. 계곡 물에 휩쓸려 가던 나를 건져주신 고마운 분이 없었으면, 지금처럼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었을까. 초등학생의 일기장 내용이 정말 재미있다고 칭찬해주신 선생님 덕에 지금까지도 글을 쓰는 일을 좋아한다.

올해는 내 작은 관심이 필요한 사람이 나타난다면, 피하지 않을 것이다. 내 앞가림도 제대로 못 한다고 거절했던 한 후배의 취업 상담 요청부터 응할 생각이다. 길에서 쓰러진 사람을 만나는 급작스러운 상황이 다시 생긴다면, 망설이지 않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 것이다. 쓸데없는 관심을 넣어둬야 하는 때도 있지만, 분명 관심을 내어보여야 하는 때도 있는 것 같다.

손수지 엔자임헬스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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