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임산부와 영유아 143명이 원인을 알 수 없는 폐 손상으로 숨진 ‘가습기 살균제 사망 사건’을 수사 중인 검찰이 가습기 살균제 원료와 제품을 제조한 업체 대표 등 전현직 핵심 임원 30∼40명을 출국 금지한 것으로 25일 확인됐다. 검찰이 가습기 살균제를 제조한 기업 대표 등을 직접 겨냥함에 따라 수사의 파장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팀(팀장 이철희 형사2부장)은 가습기 살균제를 제조해 판매한 옥시레킷벤키저 신현우 전 대표이사, 롯데마트 노병용 전 사장(현 롯데물산 대표), 홈플러스 이승한 전 회장 등 핵심 임원 30∼40명을 수사할 필요성이 있다고 보고 출국 금지 조치했다. 출국 금지 명단에는 옥시레킷벤키저 전현직 외국인 임원도 상당수 포함됐다. 원료 성분을 가습기 살균제 제조사에 납품한 SK케미칼의 전현직 임원도 출국 금지 대상에 일부 포함됐다.
신 전 대표는 1993년부터 2005년까지 옥시레킷벤키저 대표이사를 지냈다. 옥시레킷벤키저는 영국계 글로벌 기업인 레킷벤키저의 한국 현지법인으로, 2001년 동양화학그룹의 계열사였던 옥시의 생활용품 사업부를 인수하면서 설립됐다. 옥시레킷벤키저는 사건 발생 이후 기업명을 ‘RB코리아’로 바꿨다. 옥시레킷벤키저는 가장 많은 피해 사례가 접수돼 검찰에 의해 출국 금지된 임원만 10여 명에 이를 정도로 집중 수사 대상에 올라 있다.
롯데마트는 당시 자체 브랜드(PB) ‘와이즐렉 가습기 살균제’를 만들어 판매했다. 노병용 롯데물산 대표는 롯데마트 사업본부에서 영업본부장을 지냈다. 롯데마트 전현직 제조 책임자와 고위 임원도 최소 5명이 출국 금지된 것으로 알려졌다. ‘홈플러스 가습기 청정제’를 제조해 판매한 홈플러스도 이승한 전 회장을 비롯한 5, 6명이 출국 금지됐다.
출국 금지된 임원들 가운데 일부는 이달 설 연휴를 전후해 해외로 출국을 시도하다 출입국 당국의 제지를 받은 사실이 검찰에 포착됐다. 검찰은 외국인 임원 등 핵심 관련자들의 해외 도피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출국 금지 조치를 대거 취한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앞으로 출국 금지된 임원을 전원 소환해 조사할 계획이다.
현재 살균제 원료 성분의 위험성을 롯데마트나 홈플러스, 옥시레킷벤키저 등 업체들이 사전에 인지하고 있었다는 단서는 검찰이 해당 대기업 연구원 등의 진술을 통해 일부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수사팀은 1회 적정 사용량을 제품 겉면에 표기했다고 해서 면책되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다. 독이 든 립스틱을 제조한 뒤 ‘먹으면 죽을 수 있다’는 경고 표기를 한다고 책임을 면할 수는 없는 것과 비슷한 논리다. 검찰은 롯데마트 등 대형마트의 경우 거대 유통망을 가진 업체가 안전성에 대한 주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책임을 묻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검찰이 어느 때보다 강한 수사 의지를 드러냄에 따라 이번 수사의 파문이 어디까지 미칠지 주목되고 있다. 법조계에서는 대기업들이 위험방지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면 미필적 고의나 부작위에 의한 ‘살인’ 혐의까지 적용할 수 있다는 말까지 나돌고 있다. 검찰은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를 적용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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