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오전 9시경 전남 해남군 문내면의 한 배추밭에서 정모 씨(54)가 말했다. 그의 지시가 떨어지자 외국인 근로자 6명이 성큼성큼 밭으로 들어가 맛깔스러운 쌈배추를 한 포기씩 뽑기 시작했다. “배추 값은 이미 지불했다”는 정 씨의 말에 근로자들은 아무 의심 없이 배추를 수확했다. 약 6000m² 밭에 가득했던 배추 2000포기는 8시간 만에 몽땅 1t 트럭 3대에 옮겨졌다.
다음 날 이곳을 찾은 박모 씨(55)는 텅 빈 배추밭을 보고 깜짝 놀랐다. 박 씨는 배추를 구입하기로 한 ‘진짜’ 계약자였다. 그는 자신이 사기로 한 300만 원 상당의 쌈배추가 모두 사라진 것을 보고 해남경찰서 문내파출소에 신고했다. 경찰관 5명이 출동해 마을 가게의 폐쇄회로(CC)TV 등을 분석해 용의자 정 씨를 붙잡았다.
처음 정 씨는 “정당하게 값을 치렀다”고 주장했다. 밭주인 김모 할머니(85)에게 쌈배추 값으로 15만 원을 지불했다는 것.
경찰 조사 결과 정 씨는 배추를 뽑아 가기 직전 김 할머니에게 쌈배추를 자신에게 팔라며 5만 원을 건넸다. 김 할머니는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배추를 팔아도 되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아들은 “이미 다른 사람에게 팔았으니 안 된다”고 답변했다. 김 할머니는 “배추를 팔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정 씨는 10만 원을 할머니에게 억지로 떠넘기듯 건네고 자리를 떴다. 경찰은 정 씨가 범행이 들통날 경우를 대비해 김 할머니에게 돈을 건넨 것으로 보고 절도 혐의로 입건했다.
지난달 9일에는 문내면의 또 다른 밭에 있던 배추 1000포기가 2시간 만에 감쪽같이 사라졌다. 수사에 나선 경찰이 김모 씨(52)를 검거했다. 조사 결과 김 씨는 근로자 9명을 투입해 배추를 몽땅 뽑아 갔다.
전국 겨울배추의 70%를 생산하는 해남지역에 ‘밭떼기 절도’가 극성이다. 올해 호남지역의 잦은 폭설 등으로 겨울배추 생산량이 대폭 감소하면서 가격이 급등하자 이를 노린 절도범이 기승을 부리는 것이다.
해남에서 생산한 겨울배추 가격은 포기당 1500원 이상. 지난해에는 포기당 500원 정도에 불과했다. 전체 경찰관이 7명에 불과한 문내파출소에서만 최근 2개월 동안 배추 전문 절도범 6명을 검거했다.
절도범들은 현지 상황을 잘 모르는 외국인 근로자를 동원해 배추를 싹쓸이하고 있다. 심지어 적발돼도 “배추 값을 지불했다”며 오리발을 내미는 경우도 있다. 이들은 범행이 들통나면 배추밭을 착각했다고 주장하거나 돈을 주고 나중에 합의를 하려고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최성진 문내파출소장(49·경감)은 “지난해 말부터 배추 가격이 오르면서 절도가 이어지고 있다”며 “나이 드신 농민들을 상대로 휴대전화를 이용한 신고요령 등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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