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피는 누구에게 갈까. 따끔함을 참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헌혈해 본 사람이라면 한번쯤 궁금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피의 목적지를 알 수 없습니다. 피로 나누는 사랑은 철저하게 ‘익명의 법칙’을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헌혈은 더 큰 따뜻함으로 다가옵니다. 심하게 피를 흘려 생명이 위독한 환자가 수혈을 받으면 혈액도 보충하고 출혈도 멎습니다. 헌혈이 작은 사랑으로 큰 기적을 이루는 마술이라고 불리는 이유죠. 다만 헌혈에 대한 신뢰도가 여전히 낮은 등 아쉬운 점도 적지 않습니다. 헌혈에 관한 시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
보상 바란것 아닌데 입대 가산점이…
“A형, O형 혈액이 하루분밖에 남지 않아서 혈액수급이 비상이라는 소식을 한 달 전쯤 접했어요. 닷새 치 보유량이 적정 수준이거든요. 평소 저는 세상에 뭘 기부할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제가 O형인데 저라도 얼른 달려가서 해야겠단 생각에 헌혈했죠. 뿌듯했답니다.” ―직장인 소모 씨(42)
“5년간 틈틈이 해온 헌혈 덕에 육군 기술행정병으로 입대하게 됐어요. 어떤 보상을 바라고 한 게 아닌데 헌혈하면 입대 가산점이 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됐어요. 군대에서 일부 보직 경쟁률은 최고 300 대 1이 넘을 정도로 군대 가기 힘든데, 헌혈이 도움이 될 줄 몰랐죠. 이런 선물을 받으니 감사하고 기분도 좋아요.” ―대학생 이하용 씨(22)
“여자들은 생리 등의 핑계를 대면서 몸 쓰는 일에 소극적이라는 편견이 싫었어요. ‘여자도 잘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 고2 때부터 헌혈했죠. 그간 40번 정도 했네요. 그런데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혈색소 비중, 혈소판 수치 등 사전 검사에서 적격 판정을 받아야 해요. 남자친구와 헌혈하러 갔는데 오히려 남자친구 혈색소 비중이 낮아서 저만 했던 적도 있어요.” ―모 엔터테인먼트 김량은 대리(25)
“한국에서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서 서울 명동 헌혈의 집에 갔죠. 제가 좋아하는 슈퍼주니어가 헌혈 홍보대사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헌혈을 못하고 돌아왔죠. 외국인 등록증이 있거나 한국에서 1년을 살지 않았으면 헌혈이 안 된다고 해서 아쉬웠어요.”―중국인 관광객 왕슈란 씨(21)
“술 많이 먹은 다음 날 오후에 완전히 깼다고 느껴서 헌혈을 했는데 속에선 해독이 안 돼 있었나 봐요. 헌혈 후 제 간 수치가 높아서 부적격 혈액 판정을 받고 헌혈한 혈액을 폐기했었죠. 헌혈해야겠다고 마음먹으면 전날엔 절대 술을 안 먹죠.” ―인터넷 가구쇼핑몰 운영자 양지혁 씨(25) 아이 살려준 헌혈자들에게 그저 감사
“둘째 아이가 코피도 자주 나고 이상해서 검사를 했는데 골수성 백혈병이었어요. 그때 저희 부부 마음은 말로 다 표현을 못합니다. 자꾸 악화되어 수혈을 참 많이 받았죠. 주렁주렁 매달린 피 주머니들이 아직도 기억나요. 감사한 마음에 어떤 분들이 헌혈해 주신 건지 병원에 물어봤는데 추적할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저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 ―주부 김모 씨(40)
“아버지가 급성 골수성 백혈병에 걸리셔서 지인들에게 헌혈증 80여 장을 받았어요. 수혈에 큰 도움이 됐죠. 현재 백혈병·혈액암 환자들은 혈액암협회 등을 통해 헌혈증을 연 60장까지 지원받을 수 있지만 장기간 투병하는 분들과 잦은 수혈로 경제적인 부담이 큰 분께는 60장의 헌혈증도 부족할 수 있습니다. 지원받을 수 있는 헌혈증 수를 늘렸으면 좋겠어요.” ―취업준비생 김모 씨(25)
“가족이 수술을 받게 돼 헌혈증을 모으려고 인터넷 커뮤니티에 글을 올렸어요. 그런데 누가 ‘1000원짜리 종잇조각(헌혈증)을 누가 보관하고 있느냐’고 댓글을 올려 씁쓸했어요. 헌혈증이 있으면 전체 수혈 비용에서 20%를 차지하는 본인부담금을 공제해 주죠. 400mL 혈액 한 팩당 비용이 4만 원 안팎이니까 헌혈증 한 장당 8000원가량 공제받는 거죠. 잘못 퍼진 소문이 무섭다는 걸 깨닫고 씁쓸했죠.” ―직장인 박모 씨(35)
“길에서 하루 8시간씩 사람들에게 헌혈을 권한 지 15년째예요. 겨울철엔 오리털파카를 입고 장갑을 낀 채 서 있죠. 방학 땐 좀 나은데 요즘은 졸업·입학 철이라 헌혈 비율이 낮아요. 그래도 몇 명씩 헌혈의 집으로 보내면 기분이 좋아져요.” ―가두헌혈 권장원 송모 씨(50)
“헌혈자는 2014년 300만 명 돌파 이후 정체 상태죠. 다행인 건 지난해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때에도 헌혈률이 줄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헌혈을 가장 많이 하는 직종은 대학생과 군인이에요. 단체헌혈 의존율도 높다 보니 전염병 등이 유행하면 바로 혈액 부족 사태가 빚어집니다.” ―대한적십자사 혈액관리본부 관계자 헌혈·수혈 절차 투명하게 감시했으면
“저는 뾰족한 것과 피에 대한 공포가 있어요. 될 수 있으면 살면서 몸에 바늘을 안 꽂고 싶어요. 헌혈이 좋은 일인 건 알겠지만 약간 꺼림칙해요. 수혈도 그래요. 아무리 적은 확률이라도 운이 나쁘면 감염될 수도 있잖아요. 사람들의 선의에만 기대는 것보다 ‘혈액을 문제없이 관리하고 있다’며 헌혈이나 수혈 절차를 투명하게 공개하는 편이 참여율을 높일 수 있을 것 같아요.” ―콘텐츠제작업체 대표 안철주 씨(37)
“예전에는 예비군 훈련, 민방위 훈련을 가면 헌혈차가 대기하고 있었어요. 헌혈을 하면 오후 훈련을 면제해 줬지요. 그만큼 몸에 영향을 준다는 얘기겠죠. 이런데도 헌혈이 몸에 전혀 해롭지 않다고 말하는 건 다소 신뢰가 안 가요. 차라리 ‘하루 이틀간은 잠깐 힘들지만 환우들을 위해 헌혈에 참여해 주세요’라고 호소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공무원 신모 씨(42)
“7년간 50회 헌혈을 했어요. 언젠가 혈장 헌혈을 했는데 피부 밑에 혈액이 뭉치는 ‘피하출혈’ 현상이 발생했죠. 그때 헌혈의 집에서는 ‘멍은 한 달이면 사라진다. 정말 아프면 다시 찾아오거나 적십자사에 연락해보라’는 말뿐이었어요. 피를 헌혈받기까지는 시스템이 잘 짜여 있는데 피를 뽑고 나서의 사후관리 부분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어 아쉬웠어요.” ―대학생 이성진 씨(25)
“몇 년 전 말라리아, 간염, 에이즈에 감염된 혈액이 유통됐잖아요. 적십자사에서는 그 내용을 알린 사람을 내부고발자로 몰아 징계를 내리고 숨기기에 급급했죠. 그 뒤로도 관련 뉴스들 보면 나아진 게 없어 보여요. 에이즈 혈액을 거르는 기계를 구입했는데 업체 선정 과정에서도 비리가 있었다는 보도를 접한 기억도 나네요. 뭘 믿고 제 피를 내어주겠어요. 모든 과정을 총체적으로 관리·감시하는 시스템이 있으면 좋겠어요.” ―화가 임모 씨(59) 응급수술시 사고 위험도
“저는 Rh― 혈액형이에요. 동양에서 0.5%인 희귀 혈액형이죠. 사고로 수혈받아야 할 때는 문제죠. Rh― 혈액형 보유자들은 커뮤니티를 통해 긴급 헌혈에 나서기도 합니다. 면역질환을 가진 분들은 큰 수술을 앞두고 자기 피를 저장해 두는 자가 수혈을 하기도 하죠.” ―프로그램 개발자 이모 씨(31)
“수혈 상황이 상당히 급박할 때가 있죠. 추가 검사를 못하고 혈액을 바로 공급해야 할 때예요. 에이즈 등 중대 질병은 거르고 있지만 혈액이 들어갈 때마다 각각의 출처와 성분, 수혈자의 신체 조건과의 조응을 일일이 따져볼 순 없죠. 수혈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급한 상황이기 때문이지요. 수혈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은 늘 있습니다.” ―응급의학과 의사 김모 씨(31)
“수혈은 일종의 장기이식으로 우리 몸에 타인의 혈액이 들어올 때 많은 면역학적 반응이 나타납니다. 수혈의 대안으로 수술 전후 조혈 호르몬이나 철분제로 빈혈을 치료하고, 수술 도중에는 미리 저장해둔 자기 피를 최대한 활용하는 등의 방법으로 수혈을 피하거나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유럽과 북미 등에서 수혈의 위험성과 부작용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우리도 무수혈 치료에 관심을 기울이는 추세입니다.” ―이종현 세종병원 마취통증의학과장(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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