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구치의 한국 블로그]“손님은 하느님입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3월 3일 03시 00분


일러스트레이션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야마구치 히데코 일본 출신 이주여성공동체 ‘미래 길’ 공동대표
야마구치 히데코 일본 출신 이주여성공동체 ‘미래 길’ 공동대표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가족끼리 쇼핑을 가면 나는 맨 처음 들어갔던 가게에서 무조건 옷을 사야만 했다. 일본에서는 여러 곳을 구경하며 자유롭게 입어보고, 옷을 안 사도 “감사하다, 또 와달라”고 점원들이 기분 좋게 인사하며 보내주는데 한국에선 그게 아니었다. 가게에 일단 들어가면 점원들이 옆에 따라붙고, 주인들은 “언니 인상이 너무 좋아서 하나 입혀주고 싶다” “이게 딱 손님 옷이야. 사이즈 있을 때 사야 돼” “싸게 해줄게, 얼마면 되냐” 등 살 때까지 옷깃을 잡고 놓지 않으려 한다. 때로는 협박을 받는 것처럼 무섭기도 했다.

점원들이 자주 손님을 부담스럽게 해서 그런지 손님들도 이에 지지 않는다. 하루는 시어머니가 내게 치마를 사줬는데, 그때 가게 주인에게 50%를 깎아달라고 말하는 걸 보고 눈알이 튀어나올 뻔했다. 이게 웬 말인가! 정찰제인 일본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일본에선 상대방의 신경에 거슬리는 말은 되도록 안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손에 땀이 날 정도로 긴장되고 심장이 뛰었다. 시어머니가 엄청 배짱이 좋은 사람으로 보였다. 그때부터 주인과 손님의 거래가 시작되고, 강한 말투로 밀어붙이는 자가 이기기 마련이다. 시어머니가 “반값으로 안 팔면 그냥 가겠다”고 하자 주인은 꼬리를 내리고 처음에 불렀던 가격의 3분의 1 정도를 깎아줬다. 쾌거였다. 그때 큰 가르침을 받은 나는 50%까지 깎아달라는 말은 차마 못해도 만 원 정도까진 깎을 수 있게 됐다. 장사하는 사람도, 손님도 입담이 좋아야 재밌게 장을 볼 수 있나 보다.

손님에 대한 예의를 지키며 성실히 맡은 바를 다하는 사람들이 손님들에게도 존중받을 수 있다. 일본의 작은 비즈니스호텔에 숙박한 적이 있었다. 호텔 프런트 뒤 이중문 사이로 손님 대여용 야한 비디오들이 가득 진열돼 있었다. 그걸 본 순간 솔직히 나는 이 호텔 직원들이 ‘하찮은 일’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검은 양복 차림에 나비넥타이를 맨 직원들이 하루 종일 손님들을 친절히 응대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 자긍심이 나에게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일본에서는 우동집 아들이 대학원을 나와도 어버지의 우동집을 상속받고 새로운 메뉴를 연구한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 어떤 직업을 가져도 성실하게 일한다. 반면 한국에서는 종종 프로답지 못한 사람들을 마주한다. 식당이나 커피숍 직원들은 손님들 앞에서도 사적인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주고받는다. 치과에서도 의사선생님이 치료하는 도중 간호사들과 진료와 관련 없는 잡담을 하는 통에 기분이 상했던 적도 있다. 막내 아이를 출산할 때, 산통으로 아파하던 나를 돌봐주던 간호사는 껌을 씹고 있었다. 최근까지도 식당에서도 손님이 나갈 때 “감사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 가게가 너무 많다. 직업에 성실하지 않은 태만한 모습을 볼 때면 실망스럽다.

일본의 한 원로가수는 ‘손님은 하느님입니다’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왕도 아니고 하느님이란다. 일본 식당에선 손님이 있는 공개된 장소에서 직원들이 밥을 먹고 있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다. 손님을 기분 좋게 대하는 것에 모든 초점이 맞춰져 있다. 손님을 위해 자신의 기분을 조절하고, 힘들어도 미소 지을 수 있는 태도는 서비스업계의 기본이다. 서비스업 종사자들의 감정 노동이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들이 직업적 자부심을 갖기 위해서라도 서비스업의 기본을 지키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면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모습을 보며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에선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것을 좋게 여긴다. 그래서 일본인들을 보면 ‘가식적’이라는 표현을 가끔 한다. 그래도 난 적어도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라면 웃는 가면을 쓰고서라도 손님에게 친절히 대해줬으면 좋겠다.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고 프로답게 손님을 만족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멋있기만 하다. 그 일이 남이 하찮게 여기는 직업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자신이 정성을 담아 실천해내는 만큼 그들의 일은 더욱 가치가 생기는 것이라고 믿는다.

야마구치 히데코 일본 출신 이주여성공동체 ‘미래 길’ 공동대표
#손님#서비스업#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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