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A아파트의 회계감사를 맡은 공인회계사는 관리비 통장의 거래내역을 보고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2011년부터 2014년까지 4년 간 16차례에 걸쳐 관리소장 개인계좌로 3억7000만 원이 이체돼 있었기 때문이다. 뚜렷한 이유 없이 36차례에 걸쳐 인출된 현금만 2억4000만 원에 달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아파트 관리업무와 관련이 없는 사람들의 은행계좌로 55차례에 걸쳐 12억3000만 원이 흘러들어갔다. 무려 20억 원의 큰 돈이 아파트 관리와 무관하게 통장에서 빠져 나간 것이다. 정부는 관할 지방자치단체를 통해 해당 아파트에 대한 집중감사를 실시해 불법 사실이 드러나면 수사당국에 고발 조치할 계획이다.
○ 관리비는 쌈짓돈
정부가 대대적인 아파트 관리점검에 나선 것은 수십 년 간 누적돼 온 아파트 관리의 적폐를 바로잡기 위해서다. 이번 감사에서도 관리비 횡령, 금품수수, 사업자 선정지침 위반, 부당 관리비 부과 등 ‘비리 복마전’을 방불케 할 만큼 다양한 유형의 비리들이 적발됐다. 특히 비리를 감독 관리해야 할 입주자대표나 관리소장 등에 의한 비리가 절대다수를 차지했다. 경찰의 아파트 비리 특별단속으로 입건된 153명 중 76.7%가 입주자대표회장과 관리소장이었다. 전문가들은 “도둑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이었다”며 “일반적으로 입주민들이 아파트 관리에 무관심한 데다 아파트 회계를 감시할 시스템이 미비한 게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이들은 아파트 관리비를 자신들의 ‘쌈짓돈’처럼 사용했다. 경북 포항 B아파트의 입주자대표는 2013년 7월부터 2015년 8월까지 아파트 관리비 통장에서 모두 44차례에 걸쳐 6100여만 원을 출금해 개인용도로 횡령했다. 경기 C아파트는 아파트 부녀회가 관리비 1500만 원을 임의로 사용했다가 적발됐다.
아파트 관리비 사용처를 밝혀줄 회계장부는 주먹구구식으로 작성돼 조사대상 8991개 단지 중 1610곳(19.4%)이 부적합 판정을 받았다. 일반 상장기업들의 회계처리부실 비율(1%)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높은 수치다.
부적합 판정을 받은 아파트 중에서는 관리비의 현금흐름표를 작성하지 않아 현금흐름 확인이 어려워 문제가 된 곳(517건·43.9%)이 가장 많았다. 서울 D아파트의 위탁관리회사는 매월 아파트 관리비 통장에서 자금을 인출한 뒤 월말에 자금을 다시 입금하는 방식으로 약 5억 원을 무단 사용했지만 외부감사가 있을 때까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아파트 청소·경비 용역업체 선정과 주차장 및 편의시설 공사 입찰 과정에서 금품이 오가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경기 화성시 E아파트의 외벽 도색공사 입찰에 참여했던 한 업체는 다른 회사의 서류를 자신들의 것으로 위조해 입찰에 참여한 뒤 입주자대표에게 1500만 원을 줬다가 적발돼 경찰에 구속됐다.
입주민 몰래 은근슬쩍 관리비를 이중 부과하는 일도 있었다. 서울 F아파트는 승강기 보수 및 교체공사를 하면서 1600만 원의 공사대금을 장기수선충당금에서 사용해야 하지만 수선유지비 명목으로 지출한 뒤 입주자에게 별도로 관리비를 부과했다. 관리비에 장기수선충당금이 포함돼 있으므로 해당 아파트입주자들은 이중으로 돈을 낸 셈이다.
○ 중첩 비리 감시망 구축
정부는 일회성 단속에 그치지 않고 제도개선을 통해 아파트 비리를 근절한다는 방침이다. 아파트에 대한 외부회계감사 결과를 감독기관인 지자체에 제출·보고하도록 의무화해 감사 업무에 활용하는 등 외부통제를 강화하기로 했다. 감사방해 행위와 거짓자료 작성·제출 행위에 대한 제재를 현행 ‘1000만 원 또는 500만 원 이하 과태료’에서 ‘1년 이하 징역 또는 1000만 원 이하 벌금’으로 강화한다. 또 한국감정원이 운영하는 ‘공동주택관리정보시스템(K-apt)’을 적극 홍보해 입주민들이 각종 감사 결과와 관리비 내역 등을 확인할 수 있도록 유도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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