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몽은 2013년 6월 시작됐다. 노래방 도우미로 일하다 신모 씨(38)를 만난 김모 씨(38)가 아예 신 씨의 집으로 들어온 것이다. 신 씨는 원영이 남매에게 김 씨를 ‘새엄마’라고 소개했다. 그렇게 어색한 동거와 함께 새엄마의 학대가 시작됐다.
지난해 4월 원영이 누나(10)는 친할머니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홀로 남은 일곱 살 원영이에게 더욱 가혹한 학대가 이어졌다. 같은 해 11월 김 씨는 집 안 욕실 겸 화장실에 원영이를 감금했다. 대소변을 가리지 못한다는 이유였다. 이때부터 3개월간 원영이의 지옥 같은 감금생활이 시작됐다.
40m²가 채 안 되는 작은 빌라의 욕실이라 별도 난방시설이 없었다. 창문 밖의 냉기가 그대로 들어오는 곳이었다. 원영이는 담요 한 장 없이 갇혀 한 발짝도 나오지 못했다. 감금 초기 살며시 문을 열고 나오려다 걸려 김 씨에게 몇 차례 혼난 뒤로는 아예 나올 엄두도 내지 못했다. 낮에는 물론이고 밤이면 칠흑처럼 어두운 화장실에서 원영이는 무서움에 떨었다. 울다 지쳐 욕실 바닥에 쓰러져 잠들었다.
처음에는 퇴근한 아버지를 그리워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원영이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신 씨는 김 씨와의 재혼생활에 매우 만족해했다. 어린 원영이의 마음속에서 아버지는 점차 잊혀져 갔다. 그럴수록 김 씨의 학대는 더욱 노골적으로 바뀌었다. 소변 볼 때 작은 실수만 해도 바로 매질이 이어졌다. 올 1월 초 원영이는 구타를 당하다 넘어져 변기에 이마를 다쳤다. 김 씨는 찢어진 이마에 붕대만 감아줬다. 신 씨 부부는 원영이가 갇혀 있는 욕실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씻고 볼일을 봤다. 특히 김 씨가 들어올 때면 원영이는 화장실 벽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벌벌 떨며 서 있었다.
올 1월 28일 김 씨는 원영이의 무릎을 꿇린 뒤 표백제를 쏟아 붓기도 했다. 이 충격으로 원영이는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그리고 나흘 뒤 바지에 대변을 쌌다는 이유로 원영이는 발가벗긴 채 찬물을 뒤집어써야 했다. 결국 다음 날 원영이는 욕실 바닥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원영이가 당한 학대는 부검 결과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사인은 기아와 다발성 피하출혈 및 저체온 등의 요인으로 추정된다”는 소견을 내놨다. 머리 부위는 폭행에 의한 다발성 출혈이 관찰됐고 온몸엔 멍 자국이 있었다. 이마에서는 표백제로 인한 것으로 추정되는 피부가 딱딱해지는 섬유화 현상이 관찰됐다. 피하지방은 거의 없었고 위에서는 내용물 없이 점액질만 검출됐다. 키는 112.5cm로 같은 나이 어린이 중 하위 10%에 속했고, 몸무게는 15.3kg으로 저체중으로 나타났다.
13일 오전 원영이의 장례가 치러졌다. 친모(39)와 유족, 평택시와 지역아동보호센터 관계자 등 약 30명이 원영이의 마지막을 배웅했다. 친모는 화장로로 들어가는 아들의 관을 붙잡고 한동안 오열했다. 원영이의 외할머니는 “우리가 만났을 때에는 학대를 당하고 있는지 전혀 몰랐다. 만나면 뭐라도 챙겨주려고 했던 손자인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원영이의 유골은 이날 오후 평택시립추모공원에 안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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