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기사인 손근기 5단(29)은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결이 한창일 때 어머니에게서 깜짝 놀랄 만한 부탁을 받았다. 바둑을 가르쳐줄 수 없느냐는 얘기였다.
“제가 바둑 배운 지 20년이 넘었고 입단한 지 13년이 됐는데 그동안 바둑 두는 아들에겐 정성을 쏟으셔도 바둑 자체에는 한 번도 관심을 보인 적이 없는 어머니가 처음으로 그런 말씀을 하는 걸 보고 놀랐습니다. 세돌이 형과 알파고 대결이 큰 영향을 미친 것 같습니다.”
인간과 인공지능의 대결 덕에 바야흐로 바둑 붐이 일고 있다. 바둑을 전혀 몰랐던 사람들은 바둑을 알고 싶어 하고, 바둑을 조금이라도 알던 사람들은 다시 바둑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번 대결 5국은 지상파 3사를 비롯해 방송사 10곳이 생중계를 했으며 승부의 고비였던 오후 4시 반경 한 포털사이트의 동시접속자 수는 45만 명을 넘었다. 이쯤 되면 올림픽이나 월드컵 못지않은 열기다. 바둑 책과 사이트, 학원 등 모든 분야에서 폭발적인 관심 증가가 피부로 느껴진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9∼16일 바둑 책 판매량은 전주보다 97% 상승했고 특히 이 9단의 자서전 ‘판을 엎어라’는 대결 초기엔 하루 200∼300권 나가다가 최근엔 1000권씩 팔리고 있다.
▼ “바둑의 매력 재발견!”… 학원 강습문의 10배로 늘어 ▼
바둑 붐이 인 것은 70년 한국 현대바둑사에서 두 차례 있었다. 1980년 일본에서 조치훈 9단이 명인을 쟁취했을 때와 1989년 조훈현 9단이 녜웨이핑 9단을 3-2로 물리치고 응씨배에서 우승함과 동시에 이창호 9단이 혜성같이 등장했을 때였다. 조훈현 9단이 응씨배에서 우승한 뒤 귀국했을 때는 김포공항부터 한국기원(당시 서울 종로구 관철동)까지 카퍼레이드를 하기도 했다. 바둑계는 이번이 앞선 두 번보다 더 강한 ‘세 번째 바둑 열풍’이라고 반기고 있다.
이세돌 9단-알파고의 최종 대국이 끝난 다음 날인 16일 찾은 서울 성동구 왕십리로에 있는 ‘이세돌 바둑연구소’(연구소)는 바둑 열기로 뜨거웠다. “학원 강습 문의가 평소보다 10배는 많은 것 같아요. 정신이 하나도 없네요.”
연구소 김정열 대표(53)는 전화를 받느라 바빴다. 그는 이번 대국으로 바둑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게 피부로 느껴진다고 했다. 연구소에는 이 9단과 형 이상훈 9단이 이사로 있다. 형제는 바둑도장을 오래 꾸려온 김 대표와 함께 2014년 12월 문을 열었다. 연구소 원생은 50여 명으로 대부분 프로기사 지망생들이다.
이세돌 9단은 경기가 없을 때면 주 1∼3번 예고 없이 연구소에 온다. 연구소 사범인 류동완 3단(27)은 “이 9단이 바둑판 앞에 앉을 때면 원생 수십 명이 몰려들어 그를 둘러싸고 한마디 한마디를 경청한다”고 말했다. 형 이상훈 9단은 보통 오후 1시부터 연구소에 나와 끝날 때까지 원생들을 지도한다. 그는 “어린이들이 컴퓨터 게임에 빠졌다고 걱정하는 부모가 많은데, 바둑은 3개월만 배우면 게임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재미있어 한다”고 했다.
일반인에게 바둑을 가르치는 학원에 대한 관심도 크게 늘었다. ‘꽃보다 바둑’은 여성 프로기사인 이다혜 4단, 문도원 배윤진 김미리 3단, 김혜림 2단이 일반인을 대상으로 문을 연 바둑 학원이다. 이 4단은 “최근 전화와 블로그를 통해 바둑을 배우고 싶다는 문의가 10배쯤 늘었다고 보면 된다”며 “특히 젊은 여성의 문의가 많다”고 말했다. 바둑은 보통 남성들의 오락으로 알려졌지만 ‘꽃보다 바둑’이 최근 새로 만들 예정인 입문반엔 정원 12명 중 11명이 여성이다.
이 4단은 “지난해 드라마 ‘미생’과 올해 극중 바둑 천재 최택(박보검)이 나온 ‘응답하라 1988’을 통해 젊은 여성들의 바둑 관심도가 서서히 높아지고 있었는데 이번 대결로 폭발한 것 같다”며 “인터넷에서 ‘수읽기에 집중하는 이 9단의 표정이 섹시하다’ 등의 글을 많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바둑 사이트도 접속자가 폭주하고 있다. ‘사이버오로’의 경우 하루 평균 동시접속자 수가 대결 전보다 40% 가까이 늘었고 회원 가입도 3배 이상 늘었다. 타이젬의 경우도 동시접속자와 회원 가입이 큰 폭으로 늘었을 뿐 아니라 추가 서비스인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 ‘은별’의 이용자도 크게 늘었다.
이 같은 열풍에 한국 바둑의 핵심 축인 한국기원과 대한바둑협회는 고무된 상태다. 대한바둑협회 박장우 사무처장은 “유치원 바둑 강의 지원 사업, 초등학교 방과 후 교실의 바둑 수업 개설, 바둑 특성화고 추가 설립 등 지원책을 실행하고 있으며 바둑 인구 확충에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바둑 관계자들은 바둑 중흥을 위한 인프라가 현재 너무 부족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우선 이번 대결 이후 바둑을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아졌지만 딱히 적절한 대답을 해주기가 쉽지 않을 정도다. 최근 일부 프로기사들이 세운 학원 외에는 성인이 바둑을 배울 곳이 마땅치 않다. 요즘 세대에 맞는 바둑용 교재나 전문적인 바둑 강사도 부족하다. 김만수 8단은 “바둑은 배우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어서 초반에 잘 이끌어주는 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며 “재미있는 동영상이나 게임 등을 통해 바둑에 흥미를 느끼도록 하는 교재, 강의 등을 시급히 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기원이 그동안 프로 기전과 아마 고수 대회 위주의 행정을 펼치다 보니 아마 바둑계 전반의 진흥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지적도 있다. 실제 바둑 인구는 계속 감소하는 추세다. 한때 1000만 명까지 헤아리던 바둑 인구는 현재 50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바둑계 내부에선 실제 바둑에 관심 있는 인구를 200만 명 정도로 본다. 특히 1997년 체스에서 딥블루가 세계 1인자 가리 카스파로프에게 이긴 뒤 잠시 체스 붐이 불었지만 이후 체스 인기가 크게 떨어진 점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수현 명지대 바둑학과 교수는 “한국기원이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각오로 바둑 붐을 타고 바둑 인구의 저변을 넓힐 수 있는 전략을 짜야 한다”며 “바둑에 대한 해외의 관심도 높아진 만큼 바둑을 한류 상품으로 키우는 것도 생각해볼 때”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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