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주택난 문제는 서울을 비롯하여 평양 부산 대구 인천 개성 함흥 등 각 도시의 중요한 사회문제로 되고 있다.’
통일 한국의 미래를 그리는 공상 소설이 아니다. 언제 해방될지 모르는 채 일상을 꾸려 가던 78년 전 신문의 한 구절이다. ‘심각한 주택난 문제’라는 제목의 1면 사설이다.
‘도시 생활자의 다수를 차지하는 차가인(借家人)들은 그 생계비 중에 가임(家賃)이 가장 큰 부담인 까닭에 사회문제로서도 중요성을 띠는 것이니, 물가의 억제는 가임의 억제에까지 미치지 않으면 안 된다.’(동아일보 1938년 9월 18일자)
차가인은 요즘 말로 세입자이며 가임은 집세라는 뜻이다. 집을 임차한다는 뜻에서 차가이며, 집을 빌리는 대가가 가임이다. 요약하자면 주택난 문제는 세입자의 생계비 부담으로, 물가 안정과 주거 안정을 위협하는 경제 문제이자 사회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주거비 압박으로 인한 가처분소득 감소와 내수 경기 침체 등 오늘날 주택 임대차를 방불케 하는 내용이다. 지금과 시차가 별로 느껴지지 않는 과거의 주택 환경은 어떠했던 것일까.
‘경성부 내의 가구 수는 14만4000여인데 가옥 수는 8만2000여밖에 안 된다. 6만2000여 가구가 차가인이라는 말이다. 즉 43%가 셋집살이를 한다는 뜻이다.’
사설은 이렇게 단순 계산을 해 본 뒤에 다시 ‘가옥세를 납입한 자가 5만8000여 명’이라는 당국의 통계치를 적용해, 실제 가옥을 소유하지 못한 가구는 이보다 더 많은 8만5000여 곳이 된다고 계산한다. 앞의 수치는 1가구 2주택 이상 보유자를 감안하지 않은 단순 계산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전체 14만4000가구 중 60%가 집 없는 가구인 셈이 된다. 당시 서울 인구 70만 명의 6할이 ‘차가 계급’, 즉 셋집살이라는 결론이 이렇게 해서 나왔다.
이보다 6년 전에는 ‘도시 생활과 주택난’이라는 제목의 사설이 나왔다.
‘서울에 가옥은 7만여 호 있는데 그중 셋집은 2만 호이다.’(동아일보 1932년 7월 14일자)
이에 따른다면 셋집 비율은 30% 미만인데, 이후 6년간 대폭 상승했다는 뜻이다. 그동안 주택이 1만2000여 호, 즉 17%가량 늘어났는데도 불구하고.
1932년의 사설이 제시하는 문제점과 원인 분석을 풀어 쓰면 다음과 같은 요지가 된다.
‘파리나 도쿄 같은 도시에 비하면 서울은 오히려 자가(自家) 호수가 많은 편이다. 그럼에도 주택난에 헤매고 있다. 주택 문제는 세계 공통이지만 조선의 도시는 기형적 주택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옛날 서울의 살림살이를 보면 크건 작건 주택을 갖지 못한 사람은 드물었다. 최저급의 생활을 하는 일부만이 차가 생활을 했다. 조선의 차가 제도가 유독 가혹했던 것은 이와 관련이 있다. 그러던 것이 도시로의 인구 집중이 가속화됨에 따라 가옥의 매수보다 세를 얻는 수요가 증가하게 되었다. 그런데 집주인들은 종래의 관례를 고치지 않고 여전히 횡포를 부리는 것이다. 집주인은 언제든 세입자를 축출할 수 있고 세입자는 수시로 이사에 분주하다.’
사설은 다음과 같이 개선 대책을 제시한다. △높은 집세를 요구하는 집주인을 제재할 제도적 방책 △집주인이 언제든 세입자를 내보낼 수 있는 관행은 ‘차가법’ 제정으로 막을 것 △목돈이 없어서 집을 사기 힘든 사람을 위해 ‘주택조합령’을 만들어 수년 내지 10년 안에 꿈을 이루도록 할 것.
다시 6년 후로 돌아와 1938년의 사설을 보면, ‘공영주택’의 도입을 비롯한 당국의 대책이 다각도로 시도되었지만 근본적 개선은 거두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가운데서도 특이한 것은 세입자들이 단체 행동에 나섰다는 점이다. 집세가 폭등하는 대도시마다 ‘차가인 조합’이 1930년을 전후해 활발히 조직되어 과도한 집세 인상 등 집주인의 횡포를 고발하고 당국에 압박을 가했다.
그 역시 궁극적 해답을 끌어내지는 못했다. 단순히 법만으로, 경제 논리만으로 풀기 힘든, 한국적 특성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어서일까. 주택임대차보호법을 비롯해 임대주택 보급 등 각종 법적 원칙과 제도적 장치 및 시장원리가 활발히 작동하는 오늘날에도 그 난제는 여전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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