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한 TV 드라마가 시청자들에게 많은 공감을 얻었다. 회사 생활하는 인턴, 직원, 중년 남자들, 우리 자식들의 아버지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드라마 속 인물들은 물론이고 현실의 직장인들도 매일 일터에서 경쟁을 하고, 새로운 아이템을 찾아내 만들어 판다. 쉼 없이 정신적 육체적 노동을 해가며 산다. 요즘은 사람들이 너무 똑똑해져서인지, 아니면 인터넷 등 정보를 접하고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너무 많아서인지 직장은 유능한 직원으로 인정받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세계가 됐다.
내 남편도 30년이 넘도록 직장인으로 살아온 한국의 대표적인 ‘중년남’이다. 아침마다 넥타이를 매고 출근해 늦게까지 일하고, 본사와 거래처가 외국에 있어 전화, e메일 등으로 밤새 일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더니, 몇 년 전부턴 “일주일만 집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쉬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런데 해가 갈수록 그 쉬고 싶은 기간이 ‘석 달’이 되고 ‘반년’이 되더니 지난해부터는 대학에 있는 친구들의 안식년을 예로 들어가며 “그동안 수십 년을 일했으니 1년쯤 모든 것에서 놓여 편히 좀 쉬어 봤으면 좋겠다”고 한다. 아니면 “은퇴를 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얘기도 꺼낸다.
“은퇴하면 뭘 하고 싶으냐”고 물어 보니, 우선 e메일 계정을 없애고 휴대전화도 없애 30년 넘게 만들어온 모든 사회적 관계를 없애겠다고 한다. 가까운 친구들 몇 명과는 집 전화로 연락하거나 e메일을 써야 하면 PC방에 가겠다고 한다. 오랜 기간 남편이 해 온 일이 영업과 관련된 일이었던 걸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간다. 아침마다 신문을 읽으며 뉴스를 따라잡고 싶지도 않단다. 바위든 산이든 오랜 기간이 지나면 비바람에 닳고 닳아 뾰족한 것은 뭉툭해지고 직선은 곡선이 된다고 하는데, 일을 오래해 뇌와 몸을 너무 많이 써서 쉴 때가 다가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인정해줘야 하나 싶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은퇴자들을 위한 취업, 창업 교육과정들이 생겨나는 것을 보면 슬며시 걱정이 든다. 그동안 소득이 있었으니 몇 년이야 이제까지처럼 살 수 있겠지만, 많지 않은 국민연금이란 것도 10년 가까이 기다려야 하는 모양이다.
요즘은 젊든, 나이가 들었든 관계없이 취업이 어렵고 직장인들도 40대에 명예퇴직, 권고사직으로 회사에서 밀려날까 봐 전전긍긍하는데 아직 회사를 다니는 소위 ‘오학년’인 남편도 걱정이 많은가 보다. 퇴근하고 집에 와서는 컴퓨터 앞에서 은퇴해 귀농을 할까, 식물원을 해볼까, 필리핀에서 생수사업을 해볼까 하고 이것저것을 들여다본다. 꽃과 나무에 관심이 많아 식물원 도면도 그리고 수종 공부도 오래 준비하더니, 어제는 한국다알리아협회 회원이 됐다.
나도 나이가 더 들면 언젠가 사회생활에서 은퇴를 하게 되겠지. 요리사나 목수 같이 평생직업을 가지고 사는 것도 좋겠다. 몽골에는 제법 훌륭한 평생직업이 하나 있다. 바로 ‘유목민’이다. 대부분 부모님에게서 이어받아 하는 사람이 많다. 양, 소, 말을 수백, 수천 마리 키워 가축에서 나오는 양털, 우유, 고기 등에서 생기는 수입으로 생활한다. 경마에 나가는 좋은 품종의 말을 키워 비싸게 거래하기도 한다. 이렇게 가축을 키우는 방법과 기술은 나름대로 전문적이어서 일반 도시인들에게는 어렵고 힘든 직업이다. 대학 공부가 아니라 현장에서 배워야 할 수 있는 유일한 직업이라고 볼 수도 있다. 가축을 초원에 방목하기 때문에 자연에 대한 공부도 필요하다. 지역과 계절에 따른 온도, 눈과 비의 양뿐만 아니라 어떤 풀이 자라고, 어떤 계절이 방목에 더 적합한지 등을 알아야 한다. 계절별로 이동하면서 키우는 방식이라 한자리에서 오래 생활하는 도시생활과는 아주 다르다.
한국에서 생활한 지 어느덧 14년째다. 남편에게 몽골에서 같이 목장을 해보겠느냐고 물어볼까도 싶다. 남편이 유난히 추위를 많이 타는지라 실현 가능성은 거의 없겠지만, 식물원이나 목장이나 거의 비슷하게 들려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방에 지평선을 보면서 사는 생활도 괜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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