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노래는 저에게 늘 이른 봄입니다. 대학에 갓 입학한 신입생들을 위한 오리엔테이션을 한다고 추운 야외극장에 여드름쟁이 아이들을 모아놓고, 한쪽에서는 응원가를 가르치고, 다른 한쪽에서는 의식화 교육을 하기 시작하는 그런 계절 말이죠.
그 당시 저는 거의 20년 동안 의식도 없이 헛살아왔다는 사실을 선배를 통해 알게 되었었죠. 그런데 조금 있다가 보니까, 그 의식이 저와는 별로 맞지 않는 의식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의식은 분노와 열정이 많이 요구되는 것인데, 저에게는 그런 것들이 그리 많지 않았으니까요.
저와는 참 다른 어법으로 말하는, 윽박지르는 듯한 ‘세미나’는 재미없었습니다. 하지만 헤겔의 ‘정반합’은 참 재미있었습니다. 아직도 제 삶의 나침반 중의 하나가 되어 주고 있죠.
‘정반합’의 개념은 젊은이들에게는 정말 유용합니다. 기성세대와 기존의 틀과 질서를 거부하고 비판하기에는 이만한 도구가 없죠. 하지만 그 개념과 의미를 어른이 되어서도, 우리의 삶에서 합리적으로 적용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국가는 생각할 필요도 없이, 집안에서도 늘 그러니까요.
헤겔이 말하는 이상적인 사회를 위해, 공동체를 위한다는 명분하에 행해지는 억압과 강요를 부정하는 삶, 누구에게 의존하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살려면 모두 성숙한 어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그렇지 못하죠. 내가 ‘어른’이니까, 어린 사람들을 잘 가르쳐 주려고 하면, 억압하고 강요한다고 두 눈을 부릅뜹니다.
결론은, 나 자신이 언제나 부족하고 모자라다는 자기 부정, 남의 티끌보다 내 들보를 봐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다면 최소한 김건모의 노래처럼 ‘입장 바꿔 생각해봐’야 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내가 받고 싶은 만큼 베풀어줄 정도로 성숙해져야 한다는 것인데, 참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그 당시에는 그런 것들이 가능할 것 같았습니다. 우린 태양같이 젊었고,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나 의식을 찾았고, 우린 사랑스러웠으니까요. 물론 저를 사랑스럽다고 생각해준 사람은 저희 부모님밖엔 없었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이 노래를 부르며 생판 처음 보는 아가씨와 어깨동무를 하고 발을 구르고 있었을 때엔, 그녀가 저를 그렇게 봐줄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했었죠.
문제는, 가만히 살펴보면 제가 그 당시의 저에서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자유보다는 연결과 화합과 사랑을 더 원하고, 그러한 비이성적인 ‘달달한’ 것들이 저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고 있으니까요. 그런 ‘달달한’ 것들을 ‘애착이론’에서는 따뜻함, 일관성, 민감성, 관계개선 능력이라고 합니다. 좋은 부모, 좋은 친구, 좋은 선생님, 좋은 지도자의 조건이죠.
삶은 이 노래 가사처럼 거친 들판 같지만, 저는 아직도 저만이 아니라 우리 가족과 나를 둘러싼 사람들을 위한 보석보다 찬란한 무지개가, 좀 더 힘을 내서 길모퉁이를 돌아서면, 조금만 더 참고 함께 저 언덕만 넘어가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는 바보니까요. 여러분도 그렇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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