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말 동아일보 신년 기획인 ‘청년이 희망이다’ 취재차 미국 실리콘밸리 지역을 다녀왔다. 정보기술(IT) 업계를 중심으로 창업 열기가 살아 숨쉬는 곳인 만큼 그곳에서 만난 한국 청년들의 눈빛도 빛났다.
청년을 깨운 힘은 창업 지원금도, 널려 있는 일자리도 아니었다. 번뜩이는 아이디어 하나로 ‘제2의 구글’, ‘제2의 우버’가 될 수 있다는 미래에 대한 기대였다. 현지에서 채용 관련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는 문아련 씨(32·여)는 “실리콘밸리를 세계 제일의 창업 공간으로 만든 원동력은 어떤 사람이든 만날 수 있고 그들의 노하우를 들을 수 있는 이곳만의 문화”라고 말했다.
실리콘밸리 도시인 샌프란시스코나 새너제이 시내에는 창업자를 위한 공간이 넘쳐난다. 노트북 하나만 들고 자신만의 사업을 진행하는 1인 창업자들은 그곳에서 동료와 스승, 투자자를 만난다. 구글이나 페이스북 등 거대 기업으로 성장한 곳도 종종 지역 창업자를 위한 모임을 연다. 개방성은 실리콘밸리의 가장 큰 힘이다.
이곳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은 어떨까. 그들이 발 딛고 선 땅은 실리콘밸리지만 기업 안에 혈액처럼 흐르는 사내 문화는 여전히 지나치게 한국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기자는 이번 기획을 위해 총 14명의 한국인 창업자 및 취업자에게 취재를 요청했다. 현장에서 인터뷰 2시간 전에 취재를 요청한 곳도 있었지만 대부분 흔쾌히 취재에 응했다. 마이크로소프트 등 대기업 재직자도 있었지만 그들의 공통된 반응은 “여기는 실리콘밸리다. 누구든 만나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만나 준다”는 것이었다.
1주일 전부터 취재 요청을 했지만 결국 인터뷰에 실패한 곳이 딱 한 곳 있다. 바로 한국의 S사(社)다. 이곳의 한국인 직원에게 미국 취업의 비결을 묻는 인터뷰를 하겠다고 요청했다. 그는 흔쾌히 응했고, 미국 지사도 ‘OK’ 사인을 냈다. 실리콘밸리의 정서다.
문제는 인터뷰 3일 전. 해당 직원에게서 “인터뷰할 수 없게 돼 미안하다”는 e메일이 왔다. 홍보팀 직원이 배석하지 않으면 어떤 인터뷰도 진행할 수 없다는 본사의 통보가 내려왔기 때문이었다. 이미 질문할 내용까지 전달했지만, 홍보 조직이 없는 실리콘밸리 지역에선 결국 S사 인터뷰를 할 수 없었다.
실리콘밸리에서 한국 기업의 경직된 기업문화는 ‘유명’하다. 구글에서 근무하던 재미동포 A 씨는 실리콘밸리 내 한국 기업으로 이직을 시도했다. 그러나 채용 절차를 거치면서 포기했다. A 씨는 “직원들에게 창의성과 영감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의 체제 내로 얼마나 잘 편입할 수 있는지를 보는 면접이 계속됐다”며 “그래선 실리콘밸리 인재를 뽑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한국에선 “실리콘밸리를 배우자”는 움직임이 거세다. 기업 조직을 실리콘밸리 스타트업 기업처럼 바꾸겠다는 대기업도 나왔다. 사내(社內) 의사 결정 구조를 바꾸고 직급 체계를 변경하겠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실리콘밸리 지사에조차 한국식 기업 문화를 강요하는 분위기가 계속되는 한 그런 시도도 껍데기만 바꾸는 절차에 그칠 가능성이 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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