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전32패, 150골 먹은 여중생 축구부 ‘희망의 슛’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4월 18일 03시 00분


이천 율면中팀 창단 3년만에 첫승

3월 31일 강원 정선 종합보조구장에서 열린 ‘2016 춘계 한국여자축구연맹전’ 예선전을 앞두고 
경기 이천 율면중 여자 축구부 선수들과 감독이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이날 율면중은 경남 진주여중을 상대로 창단 3년 만에 
전국대회 첫 승을 거뒀다. 정선=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3월 31일 강원 정선 종합보조구장에서 열린 ‘2016 춘계 한국여자축구연맹전’ 예선전을 앞두고 경기 이천 율면중 여자 축구부 선수들과 감독이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이날 율면중은 경남 진주여중을 상대로 창단 3년 만에 전국대회 첫 승을 거뒀다. 정선=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장하다, 장유빈!”

2년 넘게 기다린 첫 골이었다. 관중석에서는 환호가 터져 나왔지만 정작 골을 넣은 장유빈(15)의 표정은 덤덤했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흩어주는 동료들에게 미소로 답한 게 전부였다. 13분 뒤 터진 두 번째 골, 이때도 장유빈은 별다른 세리머니 없이 상대 진영에서 천천히 뛰어나왔다.

○ 만년 꼴찌팀의 역사적인 첫 승

지난달 31일 강원 정선군 정선운동장에서 열린 ‘춘계 한국여자축구연맹전’ 예선. 이날 경기 이천의 율면중 여자축구부는 경남 진주여중을 상대로 창단 3년 만에 첫 승을 거뒀다. 스코어는 2-0. ‘32전 32패’에 1승이 기록되는 순간이었다.

경기가 끝난 후 벤치로 돌아온 아이들의 볼은 벌겋게 상기돼 있었다. 물을 머리에 부으며 땀을 식히는 아이들은 “좋아요”란 짧은 소감만 밝혔다. 다들 이 순간이 낯선 표정이었다. “패배 의식에 젖어 있던 아이들이라 그럴 거예요.” 한쪽 구석에서 눈물을 훔치던 이민영 감독(25·여)이 귀띔했다.

율면중 여자축구부는 2013년 11월 학생 수가 부족해 폐교 위기에 처한 학교를 살리기 위해 창단됐다. 좋은 선수를 데려오기 힘든 환경이었다. 출전하는 경기마다 번번이 졌다. 32경기 동안 실점만 150골이 넘었다. 아이들은 경기당 평균 5골을 내주며 좌절을 맛봐야 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누구보다 승리에 목말라 있었다. 이날 경기 도중 장유빈은 왼쪽 다리의 인대가 파열되는 부상을 입고도 끝까지 뛰었다. 경기가 끝나자마자 골대 옆에 주저앉았다. 코치의 등에 업힌 채 벤치로 돌아온 장유빈은 “다음 경기 쉬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걱정에 “뛸 수 있다”고 말했다. 전반전에서 팔목 뼈가 부러진 강서연(14)도 후반전까지 모두 소화한 뒤에야 병원으로 갔다.

○ 축구가 희망인 아이들

율면중 여자축구부에는 남다른 사연을 가진 아이들도 있다. 장유빈은 엄마와 아빠를 모르고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초등학생 때부터 남학생들과 어울려 놀다 보니 남학생 못지않게 축구공을 잘 다뤘다. 할머니는 그런 손녀를 축구부에 보냈다. 장사를 하느라 제대로 돌볼 형편이 안 됐기 때문이다. 장유빈에겐 축구가 기회였다. 꿈이 생겼다. “지소연 언니가 제일 좋아요. 가난한데도 실력만으로 멋지게 성공했잖아요.” 지소연(25)은 잉글랜드 첼시 레이디스에서 활약하는 한국 여자대표팀의 공격수다.

보육원에서 자란 한 선수는 친구의 부모님이 경기장에 응원을 올 때면 괜히 주눅이 들었다. 그때마다 휴대전화를 꺼내 독일 분데스리가 바이에른 뮌헨의 골키퍼 마누엘 노이어의 영상을 찾아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동영상을 보면서 노이어 같은 골키퍼가 되겠다고 다짐한단다.

율면중 여자축구부는 1승과 1무를 추가해 처음으로 본선에 진출했다. 하지만 본선 첫 상대가 너무 강했다. 5일 우승 후보인 경기 안양 부흥중에 0-1로 졌다.

33번째 패를 기록한 날 숙소로 돌아온 아이들은 경기를 하느라 미뤄야 했던 이소빈(14)의 생일 파티를 열었다.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고 노래에 맞춰 춤도 추며 즐거워했다. 익숙한 패배를 또 당했지만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봤기에 우울해할 필요가 없었다. 다음에 이기면 되기 때문이다. 율면중 여자축구부는 ‘꿈’을 차고 있다.

정선=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여중생#축구부#이천#율면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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