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는 도둑처럼 왔다. 충북 단양으로 가족여행을 다녀오던 길. 고속도로를 달리던 차가 뒤차에 받혀 밀리며 터널 입구를 들이받았다. 참기 힘든 고통을 견뎌내며 자신의 차 뒷좌석에 누워 구급대원을 기다렸다. 차창으로 들어오는 늦은 봄 햇볕이 따가웠다. ‘14년 경력의 소방관인 내가 졸지에 제복 입은 이들의 구조를 기다리는 처지가 됐구나.’ 타인의 사고 현장을 수없이 누벼온 세월. 그 와중에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허리가 너무 아팠다. ‘나쁜 일 하며 살지는 않은 것 같은데….’
최성찬 씨(43)는 2011년 5월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했다. 대학에서 응급구조학을 전공한 그는 1997년 인천시의 119구급대원 특별채용을 통해 지방공무원으로 임용됐다. 그 후 인천에서 여러 소방서를 돌며 주로 구급출동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3남매의 아버지인 그의 삶은 사고 이후 송두리째 뒤바뀌었다. 함께 차에 탔던 가족들은 큰 후유증 없이 퇴원했지만 그는 사고 일주일 뒤 척수신경이 완전히 손상돼 하반신이 마비됐다는 진단을 받았다.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병원 마당에서 한바탕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하지만 사람을 구하러 다니던 소방관이 아니던가. 재활을 시작했다. 상체를 단련해 일상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훈련부터 시작했다. 지켜보는 아내가 눈물짓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면서도 그가 1년이 넘게 이어지는 힘든 재활에 매달린 것은 복귀에 대한 희망 때문이었다.
복직하는 최성찬 소방관
보상금을 더 받아내는 소송을 하라는 권유도 뿌리쳤다. 자신이 하고 싶고, 또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러 돌아가고 싶었다. 그는 “내가 구한 심장마비 환자가 두 달 뒤 건강한 모습으로 치킨을 사들고 사무실로 찾아오는 것 같은 경험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라고 했다. 현장을 뛰어다니지 못해도 상황실 근무와 행정 업무로 동료들을 힘껏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뛰었다.
그러나 재활을 마치고 휠체어 탄 몸으로 돌아가겠다는 얘기에 원 소속 소방서는 곤란해했다. “일단 휴직을 연장한 뒤 판단하자”며 결정을 미뤘다. 1년 뒤 다시 문을 두드렸지만 그가 2013년 8월 받아든 것은 ‘직권면직’ 처분이었다. 그는 “처분을 내리기 전에 열린 위원회에서 다시 소방관으로 일하고 싶고 행정업무 등을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얘기했다”며 “노모와 3남매를 부양하는 가장이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던 것 같다”고 돌이켰다. 하지만 장애 때문에 직무를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는 기어이 복직을 거부당했다.
공무 중에 장애를 갖게 되면 복직이 가능했지만 휴무 중 사고로 장애를 갖게 된 경우는 계속 일할 수 있는지에 대한 기준이 없었던 상황이었다. 조직은 자신을 거부했지만 역설적으로 조직 안에 있던 동료들은 그의 편이었다. 이들의 격려 속에 그는 긴 싸움을 시작했다. 첫걸음은 인천지방공무원 소청심사위원회에 제기한 행정심판이었다. 변호사를 선임하며 다퉈 봤지만 2013년 11월 기각 결정이 내려졌다. 소송을 생각하던 그에게 한 동료는 “대한법률구조공단을 찾아가 보라”고 조언하며 힘을 줬다. 100명 넘는 동료는 복직 촉구 탄원서를 써줬다. 공단의 도움을 받으며 2014년 인천지법에서 소송이 시작됐다. 조직으로부터 거듭 거부당하며 느낀 절망감을 결국에 뒤집어 준 곳은 법원이었다.
인천시는 “신체 상황이 공무원 채용 요건에 미달하고 직무를 수행할 수 없는 정도”라는 논리를 폈지만 법원은 “이미 채용된 공무원의 건강 상태가 변한 것이고 내근 업무 등을 담당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며 최 씨의 손을 들어 줬다. 신체장애를 입은 소속 공무원이 남아 있는 능력으로 업무를 담당할 수 있는지를 잘 고려해야 한다는 판단은 1, 2, 3심 내내 이어졌다. 대법원은 12일 최 씨가 인천시를 상대로 제기한 ‘직권면직 처분 취소’ 소송에서 인천시의 상고를 기각하고 처분 취소를 확정했다.
요즘 최 씨는 ‘복귀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그는 “열 살 난 둘째는 내 처지를 아니까 ‘앞으론 어떤 일을 하게 되느냐’고 묻지만 두 살 어린 막내는 ‘불 끄러 뛰어다니는 것이냐’는 얘기를 한다”며 웃었다. 하지만 2년 전부터 일하고 있는 경기 고양시 일산동구의 휠체어 수입·판매사 사무실에서 19일 만난 그는 “나를 거듭 거부하던 곳으로 돌아가서 정말 잘할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고 털어놓았다. 복직에 그렇게 긴 시간과 힘든 과정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소방서에서, 소청심사위에서, 그리고 항소와 상고라는 방식으로 ‘거부’당할 때마다 자신감은 옅어져만 갔다.
최 씨는 “소송에서 이겼는데도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을 마주하면서 ‘나는 이 조직에서 정말 쓸모없는 사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대법원 판결 소식을 듣고 아내에게 전화했을 때 자신도 모르게 울음이 터지는 것을 느끼며 그는 자신이 지쳐 있다는 걸 알았다. 사고가 난 2011년 5월 29일부터 19일까지 1788일이 흘렀다.
인천시 관계자는 이날 “법원 판단을 존중하고, 최대한 빨리 복직할 수 있게 절차를 밟고 있다”며 “(항소 등의 조치는) 복귀를 저지하겠다는 뜻보다 관련 판례가 없었기 때문에 법원의 최종 판단을 받아볼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반영된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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