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azine D/Topic]세계챔피언 김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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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년 4월 28일 16시 26분


고승철의 종횡무진 시간기행 ①

동아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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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로마에서 테이블 8개짜리 자그마한 한국식당을 경영하는 쉐프 P씨는 2016년 4월 초 잠시 한국에 왔다. 야당 후보로 국회의원에 출마한 4촌 형님의 긴급 호출을 받은 것이다.

“니 좋은 목청으로 선거 로고송이라도 불러야 할 꺼 앙이가! 이태리 가서 니만 잘 묵고 잘 살모 우찌 피를 나눈 형제라 하겄노?”

B급 프로 복서 출신인 형님은 한 시대를 풍미한 남자 영화배우 O씨의 보디가드를 하다가 호텔 사장으로 변신한 인물이다. O씨를 ‘아부지’라고 부르며 따라다니다가 O씨가 실제로 자기 친자 대신 형님에게 호텔을 물려준 것이다. 물론 형님은 O씨 대신 옥살이도 했고 툭 하면 벌어지는 호텔 나이트클럽 이권 싸움에서 칼침도 10여 차례 맞았다. 왕년의 복서라지만 김성준, 김지원 세계챔피언처럼 얼굴이 곱상하고 몸매가 호리호리해 외모로 봐서는 뮤지컬 가수 또는 발레리노 출신처럼 보였다.

4촌 형님과는 달리 P씨는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 무대에도 서 본 정통파 테너인데, 콧등이 내려앉은 데다 눈매가 날카롭게 생겨 “왕년에 복싱 했소?”라는 질문을 자주 받을 정도로 얼굴이 험악하게 생겼다. P씨는 로베르토 알라냐와 비슷한 미성의 소유자인데도 고약한 인상 때문에 캐스팅 받기가 어려워 식당업으로 생계를 바꾸어야 했다.

“당신은 ‘오페라의 유령’에 출연한다면 가면을 쓰지 않아도 되겠소!”

오죽 했으면 이런 비아냥까지 들어야 했을까.

P씨가 귀국한 이유는 형님의 유세를 돕기보다는 노인요양원에 계시는 백부를 뵙기 위한 것이었다. 4촌 형님의 아버지, 즉 백부는 P씨의 유일한 집안어른이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P씨에게 백부는 친부와 같았다. 산타 체칠리아음악원에 성악 공부를 하러 떠날 때도 유학경비로 쓰라며 미화 100달러 지폐 200장이 든 두툼한 봉투를 건네주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백부도 청년 시절 프로 복서로 링 위에서 뛰었다. 한국인 최초의 세계챔피언 김기수 선수와도 붙어 비록 KO패를 당하긴 했으나, 한 방 맞고 쓰러지기 전까지는 오히려 우세했다고 한다. 백부의 말씀이 맞는다면 특A급 선수였던 셈이다.

P씨는 떼르미니 역 부근에서 식당을 개업하고 얼마 후 카리스마 넘치는 어느 노신사 손님을 맞았다. 노신사와 함께 온 대여섯 명 손님도 풍모를 보아하니 젊은 시절 주먹깨나 쓴 사람들 같았다. 노신사는 전설적인 미남배우 알랭 들롱을 닮은 얼굴로 일흔 넘은 노객이지만 반듯한 콧날과 깊은 눈동자가 돋보였다. 상의 가슴 쪽 주머니엔 마른 장미로 만든 코사지가 꽂혀 있었다.

“코레아 레스토랑이 보이기에 반가워 일부러 들어와 봤소.”

노신사는 P씨에게 악수를 청하며 말을 걸었다.

“한국과 무슨 인연이라도?”

노신사는 대답 대신 빙그레 웃기만 했다. 노신사 옆에 앉은 늙수그레한 대머리 영감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사래를 치며 목청을 높였다.

“코레아? 노!”

한국을 싫어한다는 뜻 아니겠는가. P씨는 당혹했다. 2002년 6월 18일 서울 월드컵대회 때 이탈리아팀이 한국팀에 1대 2로 패배한 악몽 때문일까?

그때 대전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16강전에서 세계 최강팀 중 하나이던 이탈리아팀은 전반 18분 비에리 선수가 1골을 성공시켜 승리를 확신하는 듯했다. 후반전 시간도 그런 상태에서 흘렀고 이탈리아의 승리로 대세가 기울었다. 그러나 후반 43분 설기현 선수의 통쾌한 동점 골이 터졌다. 이어 연장전. 연장 후반 12분경 안정환 선수의 기적 같은 결승 골든골이 이탈리아 골문 속에 깊이 박혔다. 마침내 한국팀은 거함 이탈리아팀을 격침한 것이다.

이날 응원석에는 ‘Again 1966!’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렸다. 이탈리아인들은 이 의미를 잘 안다. 1966년 7월 19일 런던 월드컵대회 때 이탈리아팀은 북한에 충격적인 0대 1 패배를 당했다. 우승 후보라던 이탈리아팀은 북한의 공격수 박두익 선수에게 한 방을 먹고 예선탈락이라는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이탈리아 반도 전체가 비탄에 빠졌음은 물론이다. 36년 세월이 흘러 이탈리아팀이 한국팀에게도 졌으니 이탈리아 축구팬들이 ‘코레아’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P씨는 조심스레 물어봤다.

“축구 때문에요?”

이번에는 노신사가 슬며시 일어서며 대답했다.

“아니오.”

노신사는 허허 웃으며 주먹을 앞으로 내뻗는 섀도복싱 동작을 몇 번 반복했다. 부드럽게 이어지는 몸놀림으로 봐서 얼치기 복서가 아니었다.

대머리 영감이 노신사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니노! 여전하네!” 노신사는 동작을 멈추고 P씨에게 말을 건넸다.

“혹시 코레아노 복서 김기수를 아시오?”

“김기수… 알지요.”

P씨는 자기 또래 한국 친구들은 아마 김기수를 모르리라고 짐작했다. P씨는 어릴 때 백부에게서 김기수 선수에 대해 숱하게 들었기에 금세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이 노신사가 니노 벤베누티가 아닐까?’

김기수 선수와 1966년 6월 25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주니어 미들급 세계타이틀전을 벌인 그 불세출의 복서! 1960년 로마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며 프로복서로 전향해 세계 왕좌에 오른 이탈리아의 국민 영웅! 그러나 김기수에게 판정으로 져 타이틀을 넘겨준 비운의 주인공….당시 프로복싱은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였다지….

“귀하가 니노 벤베누티?”

P씨가 이렇게 묻자 벤베누티는 고개를 끄덕이며 파안대소했다. P씨는 백부와 4촌 형님도 복서였다고 밝히며, 특히 백부도 김기수 선수와 링에서 주먹을 섞었다고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백부는 살아계시오?”

“예. 펀치드렁크 후유증으로 건강이 좋지 않습니다만…. 귀하가 1966년 서울에 오셨을 때 저희 백부와도 만났다고 합니다. 트레이닝 할 때 백부가 도와주셨답니다.”

“그런 인연이…. 나보다 나이가 한 살 아래인 김기수는 1997년에 작고하셨다고 들었소.”

벤베누티는 눈가에 어린 물기를 손으로 훔치고 상의 주머니에 꽂힌 코사지를 내게 건넸다.

“코레아에 가시면 백부에게 이걸 정표로 전해 주시오.”

대머리 영감은 1966년 이탈리아에서는 한국 때문에 난리가 났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니노가 한국에 가서 챔피언 벨트를 빼앗겼고 곧 이어 우리 축구팀이 북한에게 졌고….”

큰아버지가 계신 삼척시 도계읍 소재 요양원은 풍광이 수려한 숲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겉보기로는 특급호텔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내부에 들어가니 시큼한 소독약 냄새와 구릿구릿한 똥오줌 악취가 뒤엉켜 코를 막지 않을 수 없었다.

“큰아버지!”

10여 년 만에 뵙는 백부는 몸피가 미라처럼 말랐다. 김기수와 맞붙던 건장한 체격은 어디로 가고 앙상한 뼈마디만 남았다. 몸무게가 40㎏이나 될까?

백부는 P씨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눈곱이 잔뜩 낀 퀭한 눈만 껌벅거렸다. P씨는 백부를 휠체어에 태워 휴게실로 나왔다. 4월 10일 낮, 마침 TV에서는 필리핀의 국민영웅 복서 파퀴아오의 은퇴 경기가 중계되고 있었다. 상대는 미국의 브래들리. 라스베이거스의 화려한 링에서 벌어졌다.

백부는 멍한 눈으로 복싱 경기를 보다가 라운드가 거듭하자 주먹을 불끈 쥐며 생기를 되찾는 듯했다. 파퀴아오가 브래들리를 다운시키자 백부는 주먹을 허공으로 뻗으며 펀치를 날리는 포즈를 취하기도 했다.

파퀴아오의 판정승이 선언되자 백부는 두 팔을 번쩍 위로 쳐들고 워, 워… 환호하는 듯 소리를 냈다.

P씨는 벤베누티에게 받은 장미꽃송이를 백부의 환자복 상의 주머니에 꽂아주면서 속삭였다.

“큰아버지! 이 꽃은 이태리에서 가져왔습니다. 벤베누티가 주었답니다.”

“벤베…?”

백부는 어렵사리 입을 뗐다. P씨는 백부의 귀에 입을 바싹 대고 또렷이 말했다.

“벤-베-누-티!”

백부는 눈을 몇 번 끔벅거리더니 휠체어를 박차고 엉거주춤 일어섰다.

“큰아버지, 괜찮으세요?”

P씨의 물음에 백부는 대답은 하지 않고 다시 두 손을 하늘로 쳐들고 중얼거렸다.

“나는 참피온….”

자원봉사를 나온 여중생들이 백부를 보고 생글생글 웃으며 질문했다.

“할아버지, 권투 선수하셨어요?”

“으… 응….”

“챔피언 하셨나요? 할아버지 이름이 뭐예요?”

“나는 김…기…수….”

고승철 소설가 songche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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