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 경매사의 말이 끝나자 10명 남짓한 젊은이들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4시간 30분!” “5시간!” 곧이어 더 높은 숫자를 부르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마치 진귀한 미술품의 주인을 정하는 유명 경매장 같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경매에 나온 물건은 ‘고작’ 인디밴드의 CD와 음료 쿠폰이 전부다.
22일 서울 성동구의 커뮤니티하우스 디웰살롱에서 진행된 ‘봉사 경매’ 현장. 사회적 기업 볼런컬처의 고다연 대표(30·여)가 2014년 봉사 경매를 처음 선보였다. 더 많은 시간을 적어낸 참가자가 상품을 가져가고, 응찰한 시간만큼 봉사활동을 하는 방식이다. 이날 경매 수익은 총 15시간 40분. 재활 승마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단체 ‘힐링위드홀스’와 무명(無名) 예술가들의 무대를 지원하는 ‘주말극장’이 수혜자다. 상품은 기업이나 참가자의 후원으로 받는다. 제법 값이 나가는 벽걸이 조명이 나온 앞선 경매 때는 무려 281시간의 수익을 거두기도 했다.
“바쁜 사람들에게 무작정 나가서 남을 도우라고 해봤자 과연 하고 싶을까요? 휴식이나 여가를 제쳐두고 나올 만큼 재밌어야 하지 않을까요?” 고 대표가 봉사 경매를 만든 이유다.
올해는 한국 자원봉사 역사에서 특별한 해다. 20년 전인 1996년 전국에 ‘자원봉사센터’가 설치됐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2006년에는 ‘자원봉사활동 기본법’이 시행됐다. 그리고 2016년, 한국의 자원봉사 문화는 새로운 변화를 맞고 있다.
▼ “고향음식 선물 어떨까요”… 상품 기획하듯 봉사 기획 ▼
“누굴 돕는 거지?”
국민대 컴퓨터공학과 3학년 김동현 씨(26)는 전역 직후인 2013년 이런 궁금증이 들었다. 매달 3만 원씩 꼬박꼬박 나가는 통장의 기부금 명세를 보고서다. 불우한 이들을 돕겠다며 마음먹고 시작한 정기후원이지만 어떻게 쓰이는지 잘 모르니 뿌듯함이 없었다. 남는 건 쌓여가는 후원 기록뿐.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했던 봉사활동도 마찬가지였다. “복지시설이나 관공서에서 정해 준 일을 주로 했어요. 사회에 얼마나 도움을 줬는지는 알 수 없었죠. 단지 시간을 채우는 것에 불과했어요.”
2014년 김 씨 주도로 꾸려진 청년단체 ‘애드벌룬’은 봉사활동을 직접 기획해 재미있게 하는 게 모토다. 매달 첫째 주 토요일에 진행하는 활동을 위해서 약 한 달의 준비기간을 거친다. 8명으로 구성된 기획단이 큰 주제를 정하면 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참가자를 모집한다. 이후 모든 참가자의 치열한 논의를 거쳐 세부활동 내용을 정하고 실행에 옮긴다.
이달 2일에는 서울 강서구 지온보육원 아이들에게 ‘상상친구’를 실제 인형으로 만들어 안겨주는 행사를 진행했다. ‘보육원 아이들이 상상하는 것들을 실제로 보여주자’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이게 아이들 머릿속에 있는 가상의 친구를 실제 인형으로 만들어주는 프로젝트가 됐다. 지난해 8월에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앞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를 조명하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독립운동과 광복에 대한 내용을 퀴즈로 내고 정답을 맞히는 ‘광복 골든벨’과 태극기를 테마로 한 페이스 페인팅 행사를 곁들여 큰 호응을 얻었다. 모두 참가자들의 머릿속에서 나온 아이디어다.
김 씨는 “공식적으로 실적을 인정하는 증서도 없고 참가비(1만 원)까지 받지만 매회 10명에서 많게는 30여 명의 대학생과 직장인이 꾸준히 참가한다”며 “하고 싶은 봉사 활동을 직접 기획해 하는 재미와 보람, 함께 활동을 구상해 나가면서 참가자들 사이에 생기는 유대감에 큰 만족을 얻어간다”고 말했다.
‘시간’에 갇힌 재미없는 자원봉사
행정자치부 통계에 따르면 2015년 말 기준 국내 자원봉사자는 1138만여 명. 전체 인구(5153만 명)의 22% 수준이다. 2005년부터 20∼22%를 유지하며 크게 늘지도 줄지도 않고 있다. 하지만 만족도는 계속 떨어지고 있다. 2011년과 2014년을 비교해보면 ‘매우 만족스러웠다’는 응답이 43.8%에서 31.6%로 줄어든 반면 ‘별로 만족스럽지 못했다’는 응답은 3.7%에서 8.0%로 늘었다. 같은 기간 자원봉사의 경제적 가치도 13조3011억 원에서 7조9877억 원으로 거의 반 토막이 났다.
‘자원봉사활동의 해’(2016∼2018년)를 맞은 한국의 현실이다. 전문가들은 자원봉사 활동의 가치를 시간 실적으로만 따져 관리하면서 ‘스펙 쌓기’의 도구가 돼버린 탓이라고 지적한다. 봉사시간 실적 관리는 1996년 학생 자원봉사와 기업 임직원의 봉사시간 기록을 의무화하면서 시작됐다. 현재 행자부의 ‘1365’, 보건복지부의 ‘VMS’, 교육부의 ‘나이스(NEIS)’ 등 부처별로 봉사 실적을 관리해주는 포털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정부가 각 개인의 자원봉사 활동 시간을 관리하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민영서 사단법인 스파크 대표(자원봉사활동의 해 추진위원장)는 “처음 시간 실적 관리 시스템이 도입될 때만 해도 봉사활동 참여를 독려하는 순기능이 발휘됐다”며 “하지만 시스템이 고착화되면서 본래 목적인 ‘사회 변화’라는 결과보다 얼마나 했는지가 최우선이 되는 주객전도 현상을 빚고 있다”고 말했다. 봉사활동 시간 실적이 의무화된 청소년들 사이에서는 ‘편한 봉사활동 꿀팁’을 찾아 공유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됐다. 심지어 자신이 원해서 자원봉사를 시작한 게 아니라는 비중이 40%를 넘는다.
이처럼 자원봉사를 ‘시간 관리가 가능한 영역’에 두면서 결과적으로 공공기관의 무임금 노동력 수급 통로로 전락시켰다는 지적도 나온다. 행자부의 1365 포털에 등록된 봉사활동 중에는 ‘구립 문화센터 프로그램 전단 배포’처럼 흔히 생각하는 ‘참된 봉사’와는 거리가 먼 활동도 부지기수다. 15년 넘게 자원봉사 관련 기관에서 일을 한 박미혜 서울시자원봉사센터 부장은 시간 실적 관리 중심의 시스템이 만드는 폐해를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느꼈다.
“시간 관리에 연연하지 않고 수년간 열심히 봉사활동을 해 온 주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기보다 열심히 하지 않았던 사람이 실적 관리를 잘해서 상을 받고 행사에 초청되는 걸 본 거예요. 그때부터 ‘투자 대비 시간 보상’이 좋은 활동에 집착하기 시작하더라고요.”
‘스펙’에서 ‘놀이와 문화’로의 변화
볼런컬처와 애드벌룬은 ‘재미있는 놀이’ 같은 봉사활동을 추구한다. 어디까지가 봉사활동의 영역인지 크게 고민하지 않는다. 봉사시간 실적 관리나 활동 증명 따위도 전혀 없다. 참가자들에게 봉사 시간이나 내용을 정하는 데 주도성을 부여하는 것도 유사한 점이다.
이런 ‘대안 봉사활동’ 조직을 원하는 건 청년뿐만이 아니다. 페이스북을 기반으로 운영되는 봉사단체 ‘재미난 연구소’는 리더 백세인 씨(46)를 비롯한 멤버 대부분이 중년층이다. 2014년부터 △회를 뜨는 기술을 배워 회를 사 먹기 힘든 이들에게 전해준 ‘쨍 하고 회뜰날’ △다문화가정의 엄마들에게 고향 음식을 선물하는 ‘한국 엄마가 돼줘서 고마워요’ △무인도에서 자발적 조난을 당한 모습을 중계하며 보육원 식사 제공 모금을 벌인 ‘미래소년 조난’ 등 기발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한 봉사활동을 펼쳐왔다. 백 씨는 “기존 봉사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즐기지 못하고 힘들어하거나, 꾸준히 하지 못하더라”라며 “노는 과정에서 봉사활동이 되는 방법을 고민했다”고 말했다.
대안 봉사활동의 또 다른 특징은 봉사자들이 활동의 의미와 결과를 잘 알 수 있고, 봉사활동이 사회적 교류의 기반이 된다는 점이다. 설문조사 응답자들도 선호하는 봉사활동 인정의 방식으로 ‘결과 정보 제공’(79.4%)과 ‘비공식 봉사자모임 조직’(70.0%)을 꼽았다. 대부분의 자원봉사자가 자신의 활동이 어떤 결실을 낳았는지 궁금해하고, 봉사를 새로운 교류의 장으로 바라본다는 의미다. 대안학교 신촌대에서 봉사활동 문화를 전파하는 ‘심(心)봉사학과’ 학과장 우승엽 씨(27)는 “이런 변화는 봉사자들이 자신의 활동이 사회에 어떤 긍정적 변화를 만드는지 스스로 질문하고 있다는 것”이라며 “조금씩 ‘스펙’이 아닌 ‘문화’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고 평가했다. 변화는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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