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 달’인 5월의 첫날, 서울 성북구 ‘자오나학교’의 바자회에 사람들이 시끌벅적하게 모여들었다. 판매대에는 색색의 천연비누와 수세미, 수제 초콜릿이 진열돼 있었고, 뒷마당에선 봄날에 어울리는 다홍색 눈화장을 한 여학생이 어린이들에게 페이스페인팅을 해주고 있었다. 식당 앞에서는 볼이 발그레한 소녀가 “김밥 몇 줄 사세요?”라며 소리 높여 주문을 받고 있었다.
이 소녀들은 하나같이 밝은 표정이었지만 사실 마음 깊은 곳에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청소년 미혼모, 부모님이 돌아가신 소녀가장, 가정폭력·성폭력 피해자 등 학교를 다니기 어려운 형편인 청소녀(靑少女)들을 위한 자오나학교의 학생들이다. 천주교 ‘원죄없으신 마리아교육선교수녀회’가 2014년 만든 자오나학교에는 현재 16∼20세 여학생 7명과 미혼모 학생들의 아기 두 명이 머물고 있다.
또래 친구들과는 조금은 다른 환경에서 자라는 여학생들에게, 자오나학교는 ‘진짜 가족’이 되어주는 특별한 곳이다. 학교 밖 청소년들은 길어봤자 몇 개월밖에 머물 수 없는 쉼터를 옮겨 다니며 공부할 시기를 놓치기 일쑤다. 자오나학교는 이들이 돈과 숙식 걱정 없이 학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중등·고등교육 과정을 각각 2년씩 무료로 제공한다. 규모가 작은 미등록 대안학교인 탓에 비용은 후원자 1600여 명의 도움으로 충당하고 있다. 학생들이 학교를 그만둔 시기가 제각각인 만큼 교직원들이 아이들에게 ‘일대일 맞춤교육’을 해주고 있다.
점차 안정감을 찾은 학생들은 몰라보게 달라졌다. 중학교 때 가출해 쉼터를 전전하고, 아이도 낳았던 김진아(가명·20·여) 씨는 처음 학교에 왔을 때만 해도 “여기도 몇 달 있다 나가라고 할 것 아니냐”는 의심을 버리지 못했다. 하지만 아이 양육법까지 세세하게 알려주는 사회복지사, 엄마 못지않게 아이를 잘 돌봐주는 ‘이모’(다른 학생)들, 학교의 전폭적인 지지에 점점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지금은 자오나학교의 ‘큰언니’가 된 김 씨는 전산회계 자격증 공부에 매진하고 있다.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신 뒤 자오나학교에 들어온 이비아 양(18·여·세례명)은 “혼자 살 때는 월세 내는 날, 공과금 내는 날이 너무 무서웠다”며 “지금은 월세 걱정 없이 하고 싶은 공부를 마음껏 할 수 있어 행복하다”고 활짝 웃었다. 이 양은 경찰이 되고 싶다는 꿈을 당차게 밝히며 바자회에서 음식을 파는 틈틈이 두꺼운 한국사 책을 들여다봤다.
다른 학생들도 공부와 직업교육, 육아를 병행하며 각자의 꿈을 키워가고 있다. 이날 바자회에서 ‘완판(판매완료·매진)’된 초콜릿은 얼마 전 쇼콜라티에 자격증을 딴 학생이 솜씨를 발휘해 만든 제품이다. 페이스페인팅을 선보인 미혼모 학생은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꿈꾸고 있다. 곧 있으면 어린 딸이 있는 미혼모 학생이 한 명 더 들어온다는 소식에 학생들은 “남자 아기밖에 없었는데 잘됐다”며 환호성을 질렀다고 한다.
학생들의 다음 목표는 자신들의 재능을 활용한 온·오프라인 매장을 여는 것이다. 언제까지나 학교에 머물 순 없는 만큼, 졸업생들이 사회로 나아갈 디딤돌로 삼을 수 있도록 학교 주변에 공동주택을 마련하려는 계획도 세워놓았다. 교장 강안나 수녀는 “의지할 가족이 없는 여학생들이 이곳을 편안한 ‘친정’처럼 느낄 수 있게 해주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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