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교동초등학교 건너편 천도교 수운회관 건물 왼쪽에는 눈여겨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쉬운 돌 기념비가 하나 서 있다. ‘세계 어린이운동 발상지’라는 큰 제목 아래 다음과 같은 소파 방정환(方定煥·1899∼1931)의 글이 새겨져 있다.
‘어른이 어린이를 내리누르지 말자/삼십년 사십년 뒤진 옛 사람이 삼십 사십년 앞 사람을 잡아끌지 말자/낡은 사람은 새 사람을 위하고 떠받쳐서만 그들의 뒤를 따라서만 밝은 데로 나아갈 수 있고 새로워질 수가 있고 무덤을 피할 수 있는 것이다.’
어린이를 단지 돌봐야 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시대를 이끌어갈 ‘새로운 사람’으로 규정해 어른들이 그들의 뒤를 따라야만 새로워질 수 있다는 메시지는 새길수록 선각자적이고 혁신적이다.
어린이 운동 발상지 한국
기념비 앞에 ‘세계’가 붙은 것은 타당한 이유가 있다. 어린이 권리에 대해 국제사회가 처음 관심을 표명한 것이 1924년 ‘아동권리에 관한 제네바선언’인데 우리는 그보다 1년 전인 1923년 어린이 권리를 주창했다. 주창자가 바로 방 선생이다. 그해 동아일보는 5월 1일 오후 3시 서울 천도교 회당에서 열린 1회 어린이날 행사를 전하면서 이날 방 선생이 발표한 ‘어른들에게 드리는 글’도 함께 싣고 있다.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마시고 치어다(올려다)보아 주시오/늘 가까이 하시어 자주 이야기하여 주시오/경어를 쓰고 늘 보드랍게 하여 주시오/…/잠자는 것과 운동하는 것을 충분히 하게 해주시오/책망할 때에는 쉽게 성만 내지 마시고 자세 자세히 타일러 주시오/대우주 뇌신경의 말초(末梢)는 늙은이에게도 젊은이에게도 있지 아니하고 오직 어린이들에게만 있는 것을 늘 생각하여 주시오.’
기사는 이날 어린이 200여 명이 포함된 1000여 명이 거리행진을 하며 선언문을 나눠주었다고 전한다. 방 선생이 24세 때 일이다. ‘어린이’란 말도 그가 만든 말이다. 그 전까지 어린이는 아해 놈, 어린 놈, 애녀석 등으로 불렸다.
소파의 ‘어린이 사상’ 바탕에는 당대를 풍미한 ‘동학’이 있었다. 동학의 3대 교주 의암 손병희 선생의 셋째 사위였던 그는 ‘모든 사람이 곧 하늘이므로 어떤 사람이든 하늘과 같이 대하라’는 인간존중, 인간평등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동학의 ‘인내천(人乃天)’ 가르침에 따라 여성 해방, 노비 해방을 넘어 ‘어린이가 곧 하늘’이란 뜻의 ‘동내천(童乃天)’ 철학을 세우기에 이른다. 그에게 어린이는 단순히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민족의 희망이자 미래 그 자체였다.
‘어린 사람에게 정성을 바쳐야 새 운수가 온다. … 어린이는 결코 부모의 물건이 되려고 생겨나오는 것도 아니고 기성사회의 주문품이 되려고 나온 것도 아니다. 훌륭한 한 사람으로 태어나오는 것이고 저는 저대로 독특한 사람이 되어 갈 것이다.’(1923년 천도교 월회보 기고) 100년이 다 되어 가건만
소파 선생은 아동문학가나 어린이 계몽 운동가 정도로 인식돼 있지만 이 정도면 사상가 반열이다. 독립운동을 하다 투옥돼 고초를 겪었던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다. 그의 호 ‘소파(小波)’는 ‘작은 물결’이란 뜻이다. 32세로 요절한 그는 눈을 감기 며칠 전 아내에게 이런 유언을 남긴다. “어린이들 가슴에 훗날 큰 물결(대파·大波)이 되어 출렁일 테니 부디 오래오래 살아서 그 물결을 꼭 지켜봐주시오.”
제1회 어린이날 이후 100년이 다 돼 간다. 지금 이 시대 어린이는 행복한가. 그가 꿈꾸었던 어린이가 행복한 세상, 그 큰 물결은 언제 출렁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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