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명의 프리킥]살기 힘든 건 ‘여자’ 때문이 아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5월 27일 03시 00분


허문명 논설위원
허문명 논설위원
엄마 곰과 새끼는 필사적으로 도망치지만 역부족이다. 마지막 저항이라도 하겠다는 듯 엄마 곰이 뒤돌아서 아빠 곰을 밀쳐 보지만 소용없다. 수컷 북극곰은 새끼를 한입에 집어삼켜 버렸다. 지구 온난화로 얼음이 줄어 먹이를 구하기 힘든 북극곰이 이런 극단적인 방식으로 생존을 추구하고 있다며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2월 공개한 영상이다. 나는 수컷 곰의 얼굴에서 인간의 얼굴을 보았다.

‘강남 묻지 마 살인’ 사건은 단순히 개인 범죄 영역을 넘었다.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같은 온라인 공간에서나 횡행하던 ‘여성 혐오’가 현실 세계에서 집단적으로 폭발했다는 점에서 사회병리현상의 발현이며 인간 존엄성을 파괴하는 행위이다.

“못생긴 년들은 말하지 마라.” “××도 작은 새끼들이 목소리만 크다.” 차마 옮기지도 못할 상대를 향한 성적 비하 막말과 폭언이 추모 현장에서 난무하고, 한 여자 혹은 한 남자를 에워싸고 여러 명이 고성과 손가락질로 인민재판(?)을 하는 듯한 모습을 TV로 지켜보면서 어쩌다 우리가 여기까지 왔나… 심한 자괴감에 휩싸였다. 우리 사회는 지금 어디 한두 군데가 아니고 정신과 몸 모두 깊은 곳에 병이 들었다.

여자 앞에 김치, 스시, 된장 같은 말이 붙는 것에 이어 온라인 커뮤니티에 여혐(여성 혐오) 콘텐츠가 넘쳐난다 해도 그네들끼리의 감정 분출 ‘놀이’ 정도인 줄 알았다. 이제 ‘혐오’는 젊은층을 중심으로 노인 혐오, ‘헬(hell) 조선’ 같은 조국(祖國) 혐오에 ‘박혐(대통령 혐오)’ ‘친노 극혐(친노무현 혐오)’ 같은 정치 혐오, 급기야 ‘여혐’까지 왔다. 극단적 증오와 보복행위까지 포함된 혐오의 팽배는 분명 사회적 질병이다.

전문가들은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에서 소통을 배우지 못한 구성원들은 약자에게 분노와 억울함을 비겁하게 표출한다”고 말한다. 여혐을 연구하는 사회학자들은 가장 큰 이유로 돈을 꼽는다. 세계적으로 경기침체가 장기화되고 양극화가 심화되며 취업이 어려워지는 등 삶이 팍팍해지는 젊은층, 그중에서도 남성들이 자신의 밥그릇에 도전하는 여성들을 미워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연애 결혼 육아 주거 모든 것이 쟁취의 대상이 되는 사회를 살아야 하는 남자들의 분노, 돈 많고 힘 있는 사람들이 예쁘고 잘난 여자를 ‘차지’하는 풍조가 여혐을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다.

혐오를 전염시키는 또 다른 중요한 요인으로 매일 생중계되는, 시정잡배보다 저급한 정치문화도 있다. 명분과 가치, 국민 이익을 우선에 놓아야 하는 게 본업인 사람들이 사리사욕에 눈이 멀었으니 인간존중 사람존중의 가치관을 기대한다는 게 사치스러울 정도가 됐다. 혼돈의 길에 한 줄기 빛이어야 할 지성인이나 종교인들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한 대학교수(사회학)는 “대한민국 최초 여성 대통령으로 기대를 모았던 대통령의 국정난맥상과 인사 실패 등도 ‘여혐’ 풍조에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라며 “문고리 권력, 친박 낙하산, 예스맨 줄 세우기 등으로 인사 실패가 거듭된 데 대해 많은 남성들이 여성 리더십의 한계라며 남성 기득권 옹호의 빌미로 삼고 있다”고 했다.

아무리 힘껏 달려도 제자리인 시대라 해도 그건 여자 때문도 남자 때문도 아니다. 한쪽 성(性)이 다른 성을 혐오하고 게다가 범죄까지 저지르는 것은 인간 야만성의 발현이다. 남성과 여성은 서로 차이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어려움을 극복해야 하는 게 자연의 섭리이자 인간의 도리다. 인간이 야만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새끼를 잡아먹는 북극곰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허문명 논설위원 angelhuh@donga.com
#강남 묻지마 살인 사건#여성 혐오#경기 침체#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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