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 숲이었어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무슨 얘긴가. 시(詩)니까 뜻이 안 통해도 되겠지. 무슨 소린지 몰라도 어쩐지 시적이면 뭔가 있어 보여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겠지?
‘봄이 부서질까봐 조심조심 속삭였다 아무도 모르게 작은 소리로’라는 문장은 또 어떤가. 덜컹거리는 바닥과 자동차 소음, 2년 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세월호 천막과 구호들 옆에서 참으로 뜬금없는 감성이다. 교보빌딩 글판 이야기다. 25년간 꾸준히 노출되어 있었으니, 사람들은 광고인 줄도 모르고 해당 기업의 좋은 이미지를 스스로 머릿속에 심어 놓았을 것이다.
지하철역에 내려가면 모든 역 스크린도어마다 이름도 모를 그 많은 시인들의 ‘어쩌구저쩌구’의 시들이 큰 글씨로 게시되어 있다. 이름은 없어도 신선한 등불’이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사랑은 혁명적일 것, 백두산 호랑이의 투쟁적 눈빛으로’처럼 괜히 운동권 이미지이기도 하고, ‘내 설움을 비에 적시고 싶을 때 그때 너를 만나리라’같이 철 지난 소녀적 감수성이기도 하다. 2012년 12월 현재 서울시 지하철역 스크린도어에 게시된 시 작품은 모두 4686건이라고 한다.
지상으로 올라와 이 거대한 서울시의 총사령탑인 서울시청 정문을 올려다보면 ‘나를 잊으셨나요?’라는 위안부 피해자의 문구로 정치의 감성화를 시도하고, ‘잊지 마세요. 당신도 누군가의 영웅입니다’라거나 ‘괜찮아. 바람 싸늘해도 사람 따스하니’처럼 터무니없는 자존감과 희망을 불어넣어주기도 하고, ‘보고 싶다 말하고, 어느새 꽃은 피고’같이 알쏭달쏭한 말로 감성을 희롱하고, ‘보고 싶다. 오늘은 꼭 먼저 연락할게’라며 공공의 건물을 미세한 사적 영역으로 치환한다. 그중의 걸작은 갑자기 시청 건물을 유아용품 제조회사같이 보이게 만든 ‘토닥토닥’이었다. 온 시민을 갑자기 유아로 취급하는 듯해 불쾌했었다.
집에 와 신문을 펼치면 또 모든 신문들이 거의 매일같이 평론가의 글과 함께 시를 한 편씩 게재하고 있다. 가히 지금 우리 사회는 시인들의 사회이고, 시 공화국이다. 서울시는 시민 공모를 통해 선택한 일반인들의 창작 글귀를 게시하고 있다. 일상에 지친 시민들에게 위안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란다. 시민들은 왜 활기차게 있어서는 안 되고 반드시 지쳐 있어야만 하는지 모르겠지만.
문학은 높은 정신과 고귀한 감성의 영역이므로 일반에 널리 확산시키면 사람들의 심성이 순화되고 평화로운 사회가 될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신적 성찰 없는 겉껍데기의 시어(詩語)만으로 감정의 순화나 고양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오늘날 우리 사회는 보여주고 있다. 시적 감성은 오히려 상대를 공격하는 날카로운 무기가 되었다. “왜 울지 않느냐” “왜 슬퍼하지 않느냐”는 반박 불가능한 감성의 언어들로 갈등과 증오가 증폭되고 있으니 말이다.
시민들에게 강제적으로 노출되어 있다는 점에서 공공장소의 시적 문구들은 상품 광고의 폐해와 다르지 않다. 앙리 르페브르가 광고를 비판했던 논리는 교보나 시청의 글판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지하철 스크린도어에는 감성적인 시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냉정하고 이성적인 도시 행정의 개선이 필요하다. 이제 감성 과잉의 유아 단계에서 벗어나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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