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하마드 알리 1942∼2016]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쏘고 떠나다
올림픽 금메달 강에 버려 차별 저항
프로전향뒤 22세때 헤비급 챔피언… 조지 포먼 등과 세계적 명승부 펼쳐
베트남전 징집 거부로 타이틀 박탈… 은퇴후 파킨슨병 33년간 투병
오바마 “그로 인해 세상 더 좋아져” 전세계 ‘위대한 챔피언’ 추모 물결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복서였던 무하마드 알리가 4일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알리의 딸 해나는 5일 트위터를 통해 “아버지의 심장이 다른 장기들이 멈춘 상태에서도 30분 동안 더 뛰었다”며 “아버지의 영혼과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 보여주는 증거”라고 전했다.
인종 차별로 시작된 알리의 복싱 인생은 저항의 연속이었다. 허핑턴포스트에 따르면 알리는 12세 때 고향인 미국 켄터키 주 루이빌에서 자신의 자전거를 훔쳐 간 또래 백인 아이들을 혼내주려고 복싱을 시작했다. 1960년 금메달을 따낸 로마 올림픽은 그의 저항 정신을 더욱 단련시켰다. 뉴욕타임스는 “올림픽 메달을 땄지만 고향에서 멸시를 받으며 ‘올림픽 니거(nigger·흑인을 비하하는 표현)’라고 불리자 당시 100승 5패를 거둔 아마추어를 끝내고 프로로 진출해 최고가 되고자 했다”고 보도했다. 알리는 당시 저항의 표시로 올림픽 금메달을 강물에 버렸다.
프로로 전향한 그는 승승장구하면서 4년 만에 소니 리스턴을 꺾고 만 22세 39일의 나이로 헤비급 챔피언에 오르며 역사상 두 번째로 어린 챔피언이 됐다. 이후 9차 방어전까지 치른 그는 1967년 챔피언 타이틀을 박탈당했다. “베트콩은 흑인을 무시하지 않는다”며 베트남전 참전 대신 양심적 병역 거부를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미국 국가정보국(NSA)으로부터 전화 도청까지 당했지만 알리는 자신의 결정을 바꾸지 않았다.
1970년 링에 복귀해 숙명의 라이벌이었던 조 프레이저에게 프로 32경기 만에 처음으로 패한 알리는 4년 뒤 1974년 조지 포먼을 누르고 두 번째 헤비급 챔피언 벨트를 손에 넣었다. 1978년에는 레온 스핑크스를 판정으로 꺾고 세 번째 헤비급 챔피언이 됐다.
프로 통산 2만9000번의 펀치를 상대에게 날리고 1981년 56승(37KO) 5패의 성적을 남긴 뒤 현역에서 은퇴한 알리는 1984년 파킨슨병 진단을 받은 뒤에도 세상을 위한 삶을 이어갔다. 1990년 미국과 이라크전쟁 당시 이라크 지도자 사담 후세인과 벌인 미국 포로 석방 협상에 참여했던 알리는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때는 성화 최종 점화자로 나서 전 세계인들에게 감동과 용기를 줬다. 당시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남자농구 결승전 하프 타임 때 알리가 36년 전 강물에 던졌던 금메달을 대신해 새로운 금메달을 그의 목에 걸어주며 고마움을 표했다.
알리는 자신과 인생관이 다른 상대방에게 독설을 아끼지 않는 언변으로 많은 오해를 사기도 했지만 은퇴 후 인권 운동과 세계 평화를 위한 활동을 하며 영웅으로 평가받았다. 워싱턴포스트는 “단지 자유롭고 싶다는 그의 바람과 주류에 대한 저항 의식이 링 안팎에서 수많은 역사를 만들어냈다”고 보도했다. 1970, 80년대 폐쇄적이었던 중국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중국의 복싱 금지 정책을 깨는 데도 기여한 알리에 대해 홍콩의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중국을 포함한 세계인의 마음을 움직인 문화 아이콘’이라고 평가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알리는 세상을 뒤흔들었고, 그로 인해 세상은 더 좋아졌다”며 “그는 링 위에서의 투사나 마이크 앞의 시인으로서 재능이 있었을 뿐 아니라 옳은 일을 위해 싸운 사람”이라고 추모했다. 알리의 오랜 친구인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알리는 자기가 내린 결정에 대해 책임을 졌고, 살아가면서 절대 멈추지 않았다”며 “그는 미국인에서 그치지 않고 세계의 시민이 됐다”고 평가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10일 켄터키 주에서 열리는 알리의 영결식에서 추도사를 할 예정이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알리는 전설적 복서를 넘어 평화와 평등의 세계 챔피언이었다. 그는 원칙과 매력, 재치와 우아함으로 더 나은 세계를 위해 싸웠고 인류애를 고양시켰다”고 애도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