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뼘 정도 열린 문틈 사이로 조그마한 눈동자가 요리조리 굴러가는 것을 알아챈 최경옥 씨(49·여)가 크게 손짓을 했다. 두 학생의 고사리 같은 손 위로 사탕과 초콜릿 한 움큼이 쏟아졌다. “수업 끝나면 다시 와. 선생님이랑 문제집 같이 풀어 보자.”
최 씨의 직함은 인천 동방초등학교 ‘탈북학생 전담 코디네이터’다. 수시로 최 씨의 휴대전화가 울린다. “리코더를 가져오라는데 이게 무슨 뜻인가요?” “파일 속지를 준비해 오라는데 뭔지 모르겠어요.” 가정통신문을 받아든 탈북학생 엄마들이 가슴을 탁탁 치며 연락하면 자세히 설명해 주는 것도 최 씨의 업무 중 하나다.
이 밖에도 최 씨의 수첩에는 ‘1. 가정방문―부모에게 한국의 교육과정 및 학교에서 주로 쓰는 외래어 설명 2. 방과 후 학습지도 3. 학생 개인 상담 4. 학생들과 한국잡월드(청소년 종합직업체험관) 방문’ 등 그의 업무가 빼곡히 적혀 있다.
학교에서는 물론이고 가정까지 찾아가며 이 학교 탈북학생 44명을 돌보는 일은 쉽지 않다. 2006년 사선을 함께 넘어온 아들 덕분에 얻은 직업이라 그런지 2013년 6월 이후 최 씨는 누가 직업을 물어볼 때마다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듯하다.
○ 친구 없는 탈북자 아들의 방황
2007년 초등학교 5학년 아들은 친구들과 밖에 나가 뛰어노는 일이 거의 없었다. 어느 날부턴가 아들이 집에 돌아올 때 시계를 보면 오후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친구와 게임을 하고 왔다니 그나마 다행이라 여겼다. 한국에 온 이후 뭔가를 사달라고 조른 적 없던 아들은 컴퓨터를 원했다. 탈북 과정에서 밥도 제대로 못 먹인 게 안쓰러운 아들인데…. 최 씨의 발은 다음 날 곧바로 전자제품 대리점 문턱을 넘고 있었다.
이게 실수였다는 걸 깨달았을 때 이미 아들의 상태는 심각했다. 컴퓨터 게임을 못 하게 하려고 집에선 악을 쓰는 소리가 종일 들렸다. 컴퓨터를 숨겨버리자 오후 10시가 넘어 전화벨이 울리는 날이 잦아졌다. “여기 PC방인데 댁 아들이 낮부터 지금까지 계속 여기 있으니까, 어서 요금 내고 데려가요.”
PC방에 가보면 아들 자리엔 빵 봉지와 우유팩이 뒹굴고 있었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종일 게임에 몰두해 걱정이 된 주인이 준 것이라 했다. 입에선 긴 탄식이, 눈에선 한 줄기 눈물이 나왔다. 최 씨는 동네 PC방을 찾아다니며 “이렇게 생긴 아이가 오면 절대 받아주지 말라”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하지만 아들이 돌아올 때 거실 시계는 여전히 자정 무렵을 가리켰다. ‘내년이면 너희도 고교 입시생’이란 말을 듣기 시작했을 때도 악순환이 계속됐다.
최 씨의 손가락이 힘겹게 ‘전문 치료병원’이란 곳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꼭 입원해야 하나요?” “좋아질 수 있는 거죠?”라는 질문이 전파를 타고 저 멀리 병원으로 건너갔다. 결국 ‘장기입원치료 동의서’에 사인을 했다. 철문이 쾅 닫히며 아이가 입원병동으로 들어간 순간 최 씨도 주저앉았다. ‘행복하려고 온 건데….’ 집에 돌아온 최 씨의 눈은 퉁퉁 부었다.
초중고교에 재학 중인 탈북학생은 2008년 966명에서 지난해 2475명으로 늘었다. 교육부에 따르면 지난해 탈북학생의 학업중단율은 2.2%다. 2008년 10.8%보단 좋아졌지만 일반 학생의 학업중단율(0.8%)에 비하면 크게 높다.
아들은 다행히 두 달 뒤 다시 교복을 입었다. 무표정하게 가방만 메고 학교를 오가는 사이 아들은 중학교 3학년이 됐다. 아이의 표정을 바꾼 건 담임교사가 최 씨를 부른 날 이후였다. 아이에 대해 담임교사는 "예고에 보냈으면 좋겠다"고 했다. 예고? 인생에서 처음 듣는 말이었다.
미술교사가 첫 달 치 학원비를 내줬고 이후부터는 학원에서 50%를 할인해 줬다. 엄마조차 몰랐던 재능을 알아봐 준 교사 덕분에 아들은 지난해 유명 대학의 회화과 합격증을 손에 쥐고 펄쩍펄쩍 뛰었다.
○ 아들 같은 아이들 없도록…
“아이고, 북한에선 엘리트셨네요.”
탈북 직후 최 씨의 경력을 들은 사람들은 늘 이렇게 말했다. 북한에서 최 씨의 초등학교 교단 경력은 8년. 한 달 월급으로 고작 쌀 1∼2kg을 살 수 있었지만 출퇴근할 때면 동네 사람들이 다들 쳐다보는 게 일상이었다. 남한에 들어오기 직전 머릿속에선 ‘북한에선 상위 1%만 가는 대학을 졸업해 교사로 오래 일했으니 남한에서도 교단에 설 수 있을 거야’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원을 나온 뒤 그의 손에는 생활정보지가 들려 있었고 눈은 ‘아파트 입주 청소 하실 분 구합니다’라는 공고만 찾고 있었다.
기회는 우연히 왔다. 딸이 다니는 초등학교에서 ‘코디네이터’라는 사람이 가정방문을 왔다. “저도 북한에서 선생님이었어요”라는 그의 말에 최 씨의 귀가 커지는 듯했다. 아들 같은 아이들이 더는 없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절차를 밟아 코디네이터가 된 뒤 최 씨의 이름이 적힌 자격증도 사회복지사 미술치료상담사 자살예방상담사 등 여러 개 생겼다. 아이들을 정말 열심히 돕겠다는 욕심에서였다. 통일부 산하 남북하나재단에 따르면 최 씨 같은 탈북학생 전담 코디네이터는 현재 전국 21개 학교에 21명이 근무하고 있다. 모두 북한 교사 출신이다.
탈북학생들을 지도하면서 최 씨는 아들이 왜 게임에 빠졌었는지 이해하게 됐다. 주변의 ‘관심’이 부족한 탓. 탈북학생들은 대개 위축돼 있는데 말투나 북한 관련 이슈 등으로 친구들로부터 소외되기 시작하면 학교생활에 적응하기가 어렵다.
“코트 선생님.” “코치 선생님.” 탈북학생 엄마들은 외래어가 낯선 탓에 최 씨를 이렇게 부른다. 하지만 언제든 전화를 걸어 상담할 수 있는 최 씨가 있어 든든하다고 한다. 최 씨는 올해 3월 ‘탈북학생 교육지원 사업’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상도 받았다. 최 씨의 꿈은 통일 후 ‘남북 통합교육’을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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