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입 수학능력시험을 5개월 정도 앞둔 고3 교실. 선생님은 정규 수업 시간이지만 교과서 대신 EBS 교재를 펼쳐놓고 ‘열강’한다. 아이들은 한 문제라도 더 맞히기 위해 졸린 눈을 비비며 칠판을 응시한다. 그 모습이 텅 빈 골목의 가로등처럼 외로워 보인다.
나는 3학년 인문계 ‘화법과 작문’ 수업을 맡고 있다. 아무리 수능이 중요해도 1학기까지는 교과서로 공부하고 여름방학 보충수업부터 EBS 교재로 대체하겠다던 당초의 결심은 중간고사가 끝나면서부터 슬그머니 무너졌다. 수능 점수에 일희일비하는 아이들의 성화를 뿌리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EBS 교재로 하는 수업은 지극히 단순하다. 그저 주어진 문제를 풀어보고 그게 왜 답인지만 설명하면 된다. 아이들의 수업 참여도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가르치는 교사는 따분하고 배우는 학생도 지루하다.
그나마 수행평가가 있다는 건 다행이다. 제한적이긴 하지만 1, 2학년 때처럼 아이들의 참여를 유도할 수 있어서다. 수행평가 주제는 ‘협력적 스토리 이어쓰기’로 정했다. 모둠을 구성해 조원들끼리 협력하고 스토리를 공동으로 창작해 발표하는 활동이었다. 워낙 준비 시간이 짧아 완결성이나 창작성은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부실한 발표에 대한 우려는 기우였다. 아이들은 짧은 시간이었지만 기막힌 발상과 기획력으로 스토리의 흐름을 박진감 넘치게 펼쳐 나갔다. 다양한 생각을 모아 그중에서 상상력 넘치는 주제를 선택하고, 이를 통해 스펙터클하게 전개되는 이야기는 지켜보는 내게 감동 그 자체였다.
‘고구려의 영토까지 포함하여 한반도 통일을 이루기 위한 방법’, ‘맨부커상 수상작인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를 비평적 시각에서 바라본 소설 육식주의자’, ‘수능 폐지 이후에 나타난 고등학교 교실의 혁명적 변화’, ‘타임머신을 활용한 과거, 현재, 미래의 삼차원적 공유 방법’ 등 제목만 들어도 호기심을 느낄 만한 내용이 가득했다. 수행평가라는 명목으로 아이들을 평가한다는 것 자체가 미안했다. 아이들로부터 내가 배운 게 더 많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함께 박장대소를 터뜨리고 아이들과 공감하면서 교사의 행복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실감했다. 소중한 시간은 끝났고 다시 EBS 교재로 돌아가야 하지만 아이들 덕분에 나는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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