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박형주]후발자가 특별한 기회를 잡는 조건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7월 5일 03시 00분


한국인 즐겨 찾는 산티아고에서 기회 균등의 문제 체감
무응답으로 일관한 북한에 수학연맹 회원국 박탈
후발자에게 따라잡는 통쾌함을 맛볼 기회는 줘야

박형주 국가수리과학연구소장 아주대 석좌교수
박형주 국가수리과학연구소장 아주대 석좌교수
10년쯤 전에 스페인의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라는 도시에 갔다. 일정은 빡빡했고, 고풍스러운 도시의 비범한 역사와 유려한 풍광은 그냥 스쳐 보내고 말았다.

이 도시가 순례자들이 죽기 전에 한 번은 가고 싶어 하는 세계 3대 순례지 중 하나라는 얘기를 현지에서 들었다. 산티아고는 미국의 샌디에이고와 같은 말이니, 영어로는 성 제임스, 즉 성 야고보다. ‘야고보가 순교한 도시’인 이곳의 명소는 야고보의 유해 위에 지어진 성당이었고, 순교자에게 경의를 표하려는 순례자들의 발걸음이 이어지면서 지금의 명성이 생겼다.

2010년 영화 ‘더 웨이(The Way)’에서 마틴 신은 바쁘게 사는 치과의사로 나온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피레네 산맥에서 사망한 아들을 대신해 진료실을 벗어나 이 길을 완주한다. 이 영화 때문일까. 우리나라엔 산티아고 바람이 불었다. 많은 이를 이 길로 이끈 것은 일상에서의 탈출일까, 자기만의 세계로의 여행일까.

영화가 나오기 훨씬 전에 아무 생각 없이 방문했던 그곳에서 국제수학연맹 총회에 참석했다. 4년마다 열리는 총회에 당시 67개 회원국의 대표가 모였는데, 특이한 이슈는 상설 사무국 설치 여부였다. 국제수학연맹은 4년 임기의 사무총장 소재지에 사무국을 두는 전통을 유지해 왔는데, 필즈상 선정위원회의 활동 기록 등 영구 보관해야 할 기록물의 양이 4년마다 이동하면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업무 연속성 문제도 심각했다.

의견이 분분했다. 상설 사무국 유치를 원하는 곳이 여럿이고 운영비용까지 내겠다는데 뭐가 문제지? 한곳에 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을 통한 여러 문화의 경험과 포용은 대체 불가능하다고 했다. 수학의 자유와 어울리며, 작은 편의를 위해 포기할 수 없는 가치라는 것이다. 아, 이래서 세상은 간단치 않다니까. 듣고 보니 그도 맞았다. 결국은 효율과 편리가 이겼다. 그 후 세계 10여 개 도시의 유치 경쟁을 거쳐 2011년부터 독일 베를린에 상설 사무국이 설치됐다. 얻은 것도 있고, 잃은 것도 있다.

총회에서는 북한의 회원국 자격을 박탈하는 결정도 있었다. 10년 넘게 연회비를 체납하면서 연맹 측의 문의에 무응답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연맹에 한국보다 먼저 가입했고, 4년마다 열리는 세계수학자대회에 소수의 참가자라도 보내던 북한이다. 자체 수학 연구의 발전을 모색하던 열의도 재정적인 암초 앞엔 어쩔 수 없던 걸까.

물론 회원이 연회비도 안 내고 버티는 건 단체로서 지속 가능하지 않으니 이 결정은 온당했다. 돈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 참여라는 원칙의 문제였고, 그래서 연맹은 선진국엔 표결권을 더 주는 대신에 연회비를 10배 이상 물리며 책무성을 요구한다. 재정적 문제가 있는 회원국엔 납부를 유예할 준비도 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예 답변을 안 하면 다른 얘기가 된다.

그럼에도 산티아고에서의 의결 과정을 지켜보면서 마음이 무거웠다. 무거움 속엔 작은 분노도 섞여 있었다. 연맹 회원국은 다양한 국제 공동프로그램 참여 등을 통해 현대수학의 흐름을 접할 기회가 많다. 출발이 늦은 후발국들이 선진국 수학을 곁눈질할 기회조차 가질 수 없다면, 도대체 어느 세월에 그들을 따라잡고 과학기술을 발전시키며 경제적 풍요를 이룬단 말인가. 기회의 균등이라는 문제는 개인뿐 아니라 국가 간 관계에서도 일어나는구나. 그 나름의 각성이었다.

그래서 2014년 세계수학자대회 한국 유치의 캐치프레이즈는 ‘늦게 출발한 이들의 꿈’이었다. 5200명의 수학자가 참석한 서울대회에는 역사상 가장 많은 개발도상국 수학자들이 왔다. 주요 학술회의에 개도국이 참여하도록 지원 기금을 만들어 낸 한국 수학자들의 노력 덕분이다. 이들은 기회의 공평함이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세계 수학계에 전하기 위해 열병에 걸린 듯 안 가본 길을 갔다.

우리 사회에 무엇엔가 화난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청년실업 문제가 장기화하면서 무력감에 빠진 젊은이가 많고 ‘공시족’은 늘어만 간다. 개인의 준비와 노력의 문제로 환원할 수준을 넘었다. 청년이 창업해서 실패해도 흠이 안 되도록, 대기업이 떠오르는 영역마다 진입하기보다 스타트업과 협력해서 보완하는 게 득이 되도록, 사회 시스템의 변화를 서둘러야 한다. 늦은 출발은 핸디캡이 아니라, ‘따라잡는 통쾌함’을 맛볼 수 있는 특별한 기회여야 한다.

박형주 국가수리과학연구소장 아주대 석좌교수
#스페인 산티아고#성 제임스#야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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