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 오전 세계자연유산지역인 제주시 조천읍 거문오름. 작은 화산체인 오름과 용암동굴계를 둘러보는 국제 트레킹 행사가 열린 가운데 제남도서관 자연생태탐방교실 수강생 17명이 용암함몰구(천장이 무너진 용암동굴) 앞에서 제주지역 야생식물 전문가인 김명준 강사(48·제주 서귀포시)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함몰구 바닥에는 울릉도 등지에 서식하는 북방계 식물인 일색고사리가 자라고 있어요. 반면에 위쪽에는 남방계 식물인 큰섬잔고사리가 자리 잡았어요. 북방계와 남방계가 함께 자라는 특이한 곳입니다. 함몰구 지하에서 연중 18도 내외의 시원한 바람이 올라오면서 북방계 식물이 자랄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어요.”
김 강사의 설명에 농민과 회사원 공무원 등으로 구성된 수강생들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현장 교실에서 수강생들은 희귀 덩굴성 식물인 영주치자꽃과 나도은조롱을 직접 확인하는 행운도 안았다. 고비고사리와 가지고비고사리의 교잡종인 개가지고비고사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는 눈빛이 초롱초롱했다. 남방계와 북방계 식물이 교잡한 특이한 종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도 알기 힘든 부분을 김 강사는 꿰고 있었다.
○ 현장에 강한 팔방미인
제주지역 야생식물 전문가로 명성을 쌓아 가고 있는 김 강사는 ‘강사를 가르치는 강사’로 유명하다. 제주대 생물학과를 졸업한 그는 식물 관련 단체나 기관의 운영자 등을 가르치는 일을 업(業)으로 하고 있다. 숲 해설사 양성 과정, 올레아카데미, 곶자왈(용암 암괴에 형성된 자연림) 해설사 양성 과정, 지속가능환경교육센터 등에서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서귀포시 중문관광단지 여미지식물원 객원연구원이면서 제주자생식물연구회 대표를 맡고 있다.
식물 자료 연구를 위해 사진을 찍기 시작하면서 사진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중저가 카메라나 렌즈라 할지라도 초점과 음영, 선예도에서 뛰어난 사진을 얻는다. 정규 과정을 거지치 않은 채 독학으로 사진을 배웠다. 2013년 ‘제주올레길 식물’을 주제로 여미지식물원에서 개인 사진전을 열었고 서귀포문화원 꿈다락토요문화학교의 사진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취미 가운데 하나가 서예이고 자연생태는 물론 인문, 역사에도 밝아 그야말로 ‘팔방미인’이다.
대학 졸업장이 전부인 김 강사는 석사, 박사 등 학위에 관심이 적다. 경비와 시간을 투자한 것에 비해 박사학위를 취득하는 것이 실효성이 높지 않다는 판단 때문이다. 강의료가 석·박사 학위 소지자에 비해 낮은 것이 다소 불만이지만 그 대신 자신의 전문 영역을 착실하게 구축하고 있다.
김 강사의 최고 강점은 현장성이다. 희귀식물 등이 어디에, 어떻게 자생하는지를 꿰뚫고 있다. 서식 환경은 물론이고 동정(식물 특성을 찾아서 어떤 분류군에 속하는지 결정하는 것) 능력도 강하다. 특히 나무와 난, 제비꽃, 양치류 등에 대한 생태연구는 식물 전문가조차 엄지손가락을 치켜들 정도로 뛰어나다. ○ 국내 미기록종 발견 성과
현장 답사를 주로 하면서 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미기록종을 찾아내기도 했다. 몇 년 전 야생화에 관심이 많은 지인으로부터 “도저히 알 수 없는 식물이 있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곧바로 현장으로 달려가 확인한 결과 콩과에 속하는 식물로 판단됐지만 그동안 전혀 본 적이 없었다. 표본을 해야 하는데 단 1개체에 불과해서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가 겨울철 어느 날 계곡을 탐사하다 100개체가량 자라는 군락을 발견했다.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다. 1년 동안 관찰하면서 표본을 채집하고 꽃 열매 등을 확인했다. 이와 비슷한 ‘도둑놈의갈고리’가 낙엽성인 것과 달리 난대 상록성이라는 특징도 알아냈다. 국내 콩과 식물 최고 권위자인 최병희 인하대 교수가 국내 미기록종으로 동정하고 2012년 ‘영주갈고리’라는 이름으로 학계에 발표했다. 발견자로 김 강사 등의 이름이 올려졌다.
“2011년에는 흰꽃물고추나물, 2015년에는 그늘별꽃 등 국내 미기록종을 발견하고 학계에 등재하는 성과를 올렸습니다. 현장을 다니지 않으면 도저히 얻을 수 없는 소득이었죠. 올해는 붓꽃과 식물을 알리기 위해 자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 밖에도 현재 미기록종으로 확신하는 식물이 있지만 20개체 미만에 불과해 자생지로 인정받기 위해 개체수가 늘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김 강사는 대학교에서 식물생태를 주제로 학사 논문을 준비하면서 식물과 인연을 맺었다. 제주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자생식물을 공부했다. 하지만 졸업 후 집안 형편 때문에 작은아버지가 운영하는 과일 도매상에서 일하면서 식물을 잊고 살았다. 장사 재미가 쏠쏠했지만 몸을 함부로 굴려 30대 중반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 일을 그만두고 건강을 되찾기 위해 등산과 수영을 했다. ‘아름다운 산행’이라는 오름동호회를 만들어 오름을 찾아다녔고 한라산등산학교를 수료한 뒤 산악가이드 자격을 얻기도 했다.
오름동호회원과 함께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꽃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많아졌다. 다시 야생식물에 눈을 돌리게 된 계기였다. 식물도감, 학술논문을 뒤지면서 독학을 했다. 인터넷 공간은 홀로 공부를 하는 데 아주 유용한 창구였고 한국분류학회 회원으로 가입해 다양한 정보를 얻었다. 현장 전문가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다른 지역에서 식물 가이드 요청이 많아졌다. 각 분야 국내 최고 전문가와 동행하면서 배우기도 하고 제주 지역과의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식물원을 비롯해 관련 기관의 도감 제작을 위한 희귀 사진 등 자료를 부탁받으면 아낌없이 제공했다. ○ ‘수목원 조성’을 꿈꾸며
“식물은 이산화탄소를 흡수해 호흡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식량으로도 없어서는 안 되고, 의약품으로서도 식물이 꼭 필요합니다. 꽃은 종족 번식의 생식기관이지만 사람에게는 아름다움을 주는 미적 기호품입니다. 사랑의 메신저이기도 하고. 홍수 예방과 사막화 차단 등 식물의 중요성과 다양성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김 강사에게 식물은 사람을 만나고, 스스로를 드러나게 해주는 평생 벗이지만 가슴 아픈 일도 많다. 동호회원 등이 희귀식물을 찍는다면서 현장을 훼손하는 일이 자주 발생한다. 몇 년 전에는 멸종위기종 복원 사업으로 멸종위기 1급인 죽백란 500여 개체를 식재했는데 3, 4년 사이에 한 개체도 남지 않고 사라졌다. 말라 죽은 개체도 있지만 대부분 도채에 의해 사라졌다. 올해 300개체를 다시 식재했다. 민간단체에 알리지 않고 비밀리에 진행했다.
며칠 전 야생화 단체 관계자가 “위치를 알려 달라”고 요청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거절하기도 했다. 제주 지역 희귀식물이 야생화 단체나 도채 등에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대응이었다.
“국내 자생 식물을 5000종가량으로 보고 있는데, 이 가운데 2000종이 제주에 자생하고 있습니다. 좁은 면적에 비해 종 다양성이 풍부합니다. 한라산과 오름, 곶자왈, 계곡, 부속 섬 등 다양한 지형에서 식물군이 자라고 제주만의 특산식물도 많습니다. 자원으로 개발할 만한 식물도 있어요. 일반인이 이들 식물을 공부하기 어려운데, 쉽게 익힐 수 있는 안내서가 없는 듯합니다. 제주 자생식물에 대한 책을 만들어 보고 싶어요. 나이 들어서는 나무, 꽃을 가꾸는 조그만 수목원을 갖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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