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앞바다에 5개월째 떠있는 ‘원유 시추선’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7월 19일 03시 00분


유가 폭락으로 선주사 인수 거부… 현대중공업의 딱한 처지 보여줘
국민들 “하루빨리 정상화됐으면…”

현대중공업이 1999년 미국 트랜스오션사에 인도한 반잠수식 시추선 ‘딥워터 노틸러스'호. 현대중공업과 노르웨이 선주사 간의 마찰로 울산 앞바다에 5개월째 떠있는 원유시추선과 같은 형태다. 현대중공업 제공
현대중공업이 1999년 미국 트랜스오션사에 인도한 반잠수식 시추선 ‘딥워터 노틸러스'호. 현대중공업과 노르웨이 선주사 간의 마찰로 울산 앞바다에 5개월째 떠있는 원유시추선과 같은 형태다. 현대중공업 제공
“한국도 산유국(産油國)이었나?”

요즘 울산 앞바다에 떠 있는 거대한 원유시추선을 보고 시민들이 하는 말이다. 현대중공업이 3월 완공한 길이 123m, 너비 96m 규모의 반잠수식 원유시추선이다. 반잠수식으로는 세계 최대급으로 해저 1만2200m의 원유까지 뽑아 올릴 수 있다. 화려한 명명식과 함께 선주사에 인도돼야 할 이 시추선이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울산 앞바다에서 5개월째 표류하고 있다. 이유는 뭘까.

이 시추선이 발주된 것은 2012년 5월. 노르웨이 프레드 올센 에너지사(社)에서 6억2000만 달러(약 7000억 원)에 수주했다. 현대중공업은 북극해의 추운 날씨와 강한 파도에도 견딜 수 있도록 까다롭기로 소문난 ‘노르웨이 해양산업 표준(NORSOK)’에 따라 설계부터 시운전까지 맡아 건조를 시작했다. 그러나 선주사는 명확한 이유도 없이 빈번하게 설계 변경을 요구했다. 이 때문에 인도 시점이 지난해 3월에서 그해 12월로 늦춰졌다. 현대중공업은 설계 변경에 따른 추가 비용 1억6700만 달러를 더 달라고 선주사에 요구했지만 거절당하자 지난해 10월 22일 런던해사중재협회(LMAA)에 중재를 신청했다. 선주사는 이에 맞서 일방적으로 계약 해지를 통보한 뒤 선수금 1억8000만 달러 반환과 이자 지급을 요구했다. 당시 시추선 건조는 공정이 90% 이상 진척된 상태였다. 현대중공업은 건조를 중단할 수 없어 올 3월 완공했다. 하지만 선주사는 여전히 인수를 거부하고 있다. 이 시추선은 당초 울산 동구의 현대중공업 해양사업부 근처 울산만에 머물다 지금은 울산 남구의 울산신항 앞바다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선주사가 인수를 거부하고 계약을 취소한 표면적인 이유는 ‘인도 지연’이다. 하지만 유가가 시추선 발주 당시의 3분의 1 수준으로 하락해 원유 시추가 경제성이 없기 때문이란 분석이 많다. 현대중공업 관계자는 “국제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넘었을 때 선주사 측은 시추선을 빨리 건조해 달라고 부탁까지 했다”고 말했다.

현재의 상황은 현대중공업의 딱한 처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기약 없는 조선업 불황에다 정부의 구조조정 압박, 노조의 파업 등이 얽혀 있는 것이다.

그리스의 대형 선주사인 리바노스사(현 선엔터프라이즈사) 사주인 리바노스 명예회장(82)이 지난달 현대중공업을 방문해 조선업 위기를 두고 “이 고비를 넘기면 반드시 좋은 날이 찾아올 것”이라고 덕담을 했다. 리바노스 회장은 42년 전인 1974년 6월 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와 조선소가 들어설 울산 미포만 백사장 사진만 보여 주자 ‘세계 최고 조선소가 될 것’으로 확신하고 현대중공업(당시 현대조선)에 26만 t급 선박을 발주한 당사자다. 세계적인 ‘선박왕’이 한국 조선업에 희망이 있다고 분석한 것이다.

현대중공업과 노르웨이 선주사는 국제기구의 중재와는 별도로 시추선 인도·인수 협상을 계속하고 있어 협상이 급진전될 가능성도 있다. 울산 앞바다에 기약 없이 떠 있는 ‘무명(無名)의 시추선’이 명예로운 이름표를 달고 먼바다로 나가길 울산시민은 물론이고 온 국민이 간절히 바라고 있다.

정재락 기자 raks@donga.com
#울산 앞바다#원유시추선#현대중공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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