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관광버스 한 대가 전조등을 켠 채 고속도로 1차로를 달리고 있었다. 차량이 많지 않은 듯 한껏 속도를 내고 있었다. 잠시 뒤 터널 입구 1차로에 멈춰 선 차량들이 보였다. 그러나 관광버스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내달렸다. 그리고 돌진하듯 맨 뒤에 있는 차량을 들이받았다. 관광버스는 앞선 차량 5대를 밀어붙이고 터널 왼쪽 벽에 부딪힌 뒤에야 멈춰 섰다.
17일 영동고속도로 상행선 봉평터널 입구에서 발생한 연쇄 추돌사고 상황을 찍은 동영상이 18일 공개됐다. 사고 직후 관광버스 운전사는 “차로를 변경하던 중이었다”고 주장했지만 동영상에는 관광버스가 계속 1차로를 달리다 사고를 낸 것으로 나타났다. 이 사고로 가장 먼저 관광버스와 부딪힌 K5 승용차 탑승자 최모 씨(21·회사원) 등 동갑내기 여성 4명이 숨졌다. 중상을 입은 운전자 김모 씨(25·회사원)와 함께 강릉에 피서를 다녀오다 변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 “남의 일 같지가 않다”
사고 동영상은 18일 자동차 관련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왔다. 관광버스 바로 앞에서 운행하다 사고 직전 차로를 변경해 화를 모면한 다른 차량의 블랙박스에 찍힌 것이다. 동영상을 올린 운전자는 게시판에 ‘우리 가족은 사고 직전에 차로를 변경해 지금 이렇게 살아 있다. 만약 차로를 바꾸지 않았다면…. 지금 생각해도 온몸의 털이 곤두선다’고 적었다.
누리꾼들은 인터넷 게시판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사고가 아닌 살인’이라며 분노를 쏟아냈다. 누리꾼들은 “앞에 멈춰 선 차량을 보고도 속도를 줄이지 않고 달린 것은 졸음운전일 가능성이 높다”며 “하위 차로를 달려야 하는 버스가 1차로를 달린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관광버스가 탱크처럼 밀고 가는 모습이 섬뜩했다’거나 ‘소름 끼치고 무섭다’며 운전 공포증까지 호소하는 누리꾼도 많았다. 일주일 전 영동고속도로를 이용해 강릉을 다녀온 박선미 씨(37·여)는 “버스들이 속도를 내며 앞 차량에 바싹 붙어 가는 모습을 흔하게 봤다”고 말했다. 박 씨는 “내가 아무리 차간거리를 유지해도 뒤에서 이렇게 받아버리면 소용없는 것 아니냐”며 “고속도로에서 운전하기가 무섭다”고 말했다.
사고 원인은 일단 ‘졸음운전’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그러나 관광버스 운전사 방모 씨(57)는 경찰의 1차 조사에서 “졸음운전은 아니다. 단지 차들을 보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병원에 입원 중인 방 씨가 수술을 마치는 대로 추가 조사를 벌일 예정이다. 경찰 관계자는 “운전자의 전방 주시 태만은 확실하다”며 “졸음 여부와 운전 중 휴대전화 통화 여부도 조사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 휴가철 고속도로 교통안전 ‘비상’
영동고속도로는 피서철에 운전자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고속도로 중 하나다. 그러나 차로가 좁고 공사가 진행 중인 곳도 많아 곳곳에서 정체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또 산악지대 특성 탓에 터널이 많아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설재훈 한국교통연구원 선임연구원은 “터널 안에 들어가면 갑자기 어두워져 원근감이 떨어지기 때문에 반드시 진입 한참 전부터 속도를 줄여야 한다”며 “사고가 자주 일어나는 고속도로 터널 구간은 제한속도를 낮추는 정책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도로교통법에 따라 고속도로에서는 반드시 앞 차량과의 안전거리를 확보(시속 100km 때 100m 이상)해야 한다. 위반 때 범칙금 5만 원과 벌점 10점이 부여되지만 단속은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 강원지방경찰청 관계자는 “안전거리 확보 위반은 명확한 거리 측정이 힘든 데다 위반 차량이 너무 많아 사실상 단속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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