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삼국의 시조가 모두 신비스럽고 이상하게 느껴지는 데서 나온 것이 어찌 의심스럽다고 하겠는가. 이것이 기이(紀異) 편을 맨 앞에 싣는 까닭이다. 이 책(삼국유사)을 쓴 뜻도 여기에 있다.”
보각국사 일연(一然·1206∼1289)이 경북 군위군 고로면 각사에서 삼국유사(三國遺事)를 마무리했을 때 심정은 어떠했을까. 삼국유사의 서문(敍曰)의 이 마지막 문장에서 민족의 미래를 위한 그의 절실함을 느낄 수 있다.
알을 삼킨 뒤 태어나거나 발자국을 밟은 뒤 잉태하는 등 믿기 어려운 중국의 개국 신화전설과 우리나라 삼국시대 개국 신화전설은 다를 바 없이 ‘대등’하다는 것이다. 일연 국사는 바로 이런 주체성을 바탕으로 고조선 단군 기록을 자신감 있게 맨 앞에 편집했다. 몽고 침략의 비참함을 겪은 그로서는 민족의 주체적 자존심을 세우려는 절박함이 강했을 것이다.
최근 찾은 인각사에는 일연의 삶이 와 닿는 듯했다. 그는 고려의 국사(國師·나라의 스승)였지만 고향(경북 경산)에서 병들어 지내던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인각사로 모시고 삼국유사를 완성했다. 그에게 불교는 세상의 인륜과 단절이 아니었다. 부모와의 천륜을 소중히 여기고 공동체를 주체적으로 유지하고 잘 이어가야 한다는 절실함이 가슴 속 깊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곁에서 모신 노모는 그가 삼국유사를 마무리하는 데 큰 힘이 됐을 수 있다.
경북도가 일연 국사의 정신이 담긴 삼국유사를 목판으로 만드는 작업은 일연이 보여준 역사적 주체성을 계승하려는 의지다. 1512년 이후 사라져버린 삼국유사 목판을 500년 후 판각하는 것은 단절된 역사를 이어 받아 미래를 준비하는 자세이다. 8만9000여 자를 새기는 삼국유사 목판(3가지 판본 330장)은 훗날 소중한 문화재가 될 것이다. 지난해 10월 유교책판(목판)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것도 경북도와 한국국학진흥원이 각지에 흩어져 있던 목판을 10년 동안 수집한 결과였다.
경북의 이런 우직한 역사발전의식에는 경북의 정체성(正體性·바른 모습)이 흐른다. 경북도는 2011년 각계 전문가 65명으로 경북정체성포럼을 구성해 5년 동안 정체성을 찾아 4대 정신을 정립했다. 시대별로 화랑-선비-호국-새마을을 바탕으로 △정의(正義·올곧음) △신명(神明·신바람) △화의(和議·어울림) △창신(創新·나아감)을 도출했다. ‘올바른 마음으로 신바람 나게, 함께 어울려, 앞장 서 나아가자’는 뜻으로 풀이된다.
삼국유사의 원형을 보존하기 위한 판각 대업(大業)을 비롯해 신라 1000년 역사를 집대성한 ‘신라사대계(新羅史大系)’ 편찬, 공공청사의 새 모델로 사랑받고 있는 경북도청 신청사, 가족공동체 회복을 위한 할매할배의 날, 포스코와 구미전자산업에 이어 새로운 산업을 창출하는 창조경제산업, 공경하는 자세로 중심을 잡는 경상(敬商) 정신이 담긴 창업과 취업 정책, 문화로 지구촌을 연결하는 경주세계문화엑스포 등은 경북정신의 구체적 실천을 보여준다.
나라와 공동체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을까. 일연 스님은 7월에 태어나 8월에 열반에 들었다. 500년 만에 다시 새겨지는 삼국유사 목판은 ‘미래 역사’이다. 일연 국사의 일념(一念)을 계승해 경북 정체성을 대한민국 정체성으로 연결하는 실천적 노력이다. 일연 국사가 세상에 온 7월은 경북정신이 여물어가는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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