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수 손-조각도-목판 한 몸처럼
한 획 얻는데 망치질 40번
조각도는 4∼8번 들어가
목판 앞뒷면 1장에 840자 새겨
10시간 작업땐 100여 자 판각
양면 새기는 데 10일 가량 걸려
경북 군위군 사라온이야기마을에서 삼국유사 판각을 하고 있는 박웅서 안준영 박영덕 각수(왼쪽부터). 이들은 “역사를 새기는 자세로 정성을 쏟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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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판에 날카로운 조각도로 글씨를 새기는 각수(刻手)에게 “무슨 생각을 하면서 작업을 합니까”라고 묻는 건 좋은 질문이 아니다. “정신을 집중해야 합니다” 또는 “역사적인 작업이라 자부심을 갖고 새깁니다” 같은 대답을 기대할 수도 없다. 글자를 새기는 동안에는 각수도, 기자도 ‘무언(無言)’이 질문이고 대답이다. 집중 이외에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삼매경이기 때문이다.
16일 오전 경북 군위군 군위읍 사라온이야기마을 안에 있는 삼국유사목판도감소(三國遺事木板都監所). 목판과 마주한 각수들의 표정은 무색무취 같은 느낌을 보였다. 목판(가로 62cm, 세로 28cm, 두께 4cm)과 조각도를 쥔 각수의 손은 한 몸처럼 느껴진다. 박영덕 각수(52·충북 보은 운봉서각원장)는 “한 획을 얻는 데 망치질 40번, 조각도는 4∼8번 들어간다”고 했다.
각수들은 “글자를 파거나 새긴다”라고 하지 않고 ‘얻는다’(得)고 말한다. 가로세로 1cm 정도 크기인 글자가 양각으로 두드러지게 하기 위해서는 조각도와 손,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는 ‘길’(道)을 바르게 가야 한다. 그러나 한 획을 얻음은 ‘득도(得道)’의 과정이다. 각수들은 “판각은 수행(修行)과 다름없다”고 했는데 이런 차원을 가리키는 것 같다.
박웅서 각수가 삼국유사 조선 초기본을 판각하고 있다. 목판의 한 면에는 20줄을 새긴다. 1줄에 21자를 새기므로 전체 글자는 420자이다. 뒷면에도 새기므로 목판 양면 1장에는 840자를 새긴다. 하루 10시간 정도 판각할 경우 새기는 글자는 100자가량이다. 판각 전문가들이지만 양면을 작업하는 데는 10일가량 걸린다. 안준영 각수(58·경남 함양 이산책판박물관장)는 “판각을 거쳐야 인쇄를 통해 널리 공유된다는 점에서 각수의 손끝은 글의 가치를 매개하는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박웅서 각수(45)는 “삼국유사라는 소중한 문헌의 판각에 참여해 기쁘다”며 “마무리될 때까지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삼국유사(국보 306호) 목판은 1512년 임신본을 마지막으로 자취를 감추고 지금은 13종의 목판본(인쇄본)만 남아 있다. 경북도는 경상도 개도 700년과 도청 이전에 맞춰 2014년부터 추진했다. 경북 출신인 일연국사가 혼을 담아 경북에서 완성(군위 인각사)한 삼국유사 목판이 500년 넘도록 단절된 역사를 바로잡으려는 의지다. 경북도와 군위군, 한국국학진흥원이 공동으로 추진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군위에 판각을 위해 임시관청인 도감소(都監所)를 설치했다. 프랑스 출신으로 2008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장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 씨(76)가 특별자문위원에 위촉됐다. 그는 삼국유사에 관심이 많고 한국의 문화와 역사에 관한 활동을 하고 있다.
목판 작업에 필요한 조각도와 망치 등 도구. 목판은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조선중기본(서울대 규장각본) △조선초기본(범어사본) △경상북도본(중기본과 초기본을 대조해 교정한 판본) 등 3가지를 판각한다. 중기본은 지난해 8월부터 각수 7명이 작업을 시작해 올해 2월 완성(목판 112장)했다. 이 목판은 한국국학진흥원 장판각에 보관하고 있다. 지금은 올해 10월을 목표로 초기본을 판각하고 있다. 경상북도본은 내년 6월에 완성할 계획이다. 오용원 한국국학진흥원 자료부장은 “경상북도본은 조선 초기와 중기본을 정밀하게 비교해 오탈자를 바로잡고 문헌 내용이 정확하지 않은 부분까지 교정해 삼국유사 판본의 표준이라고 할 수 있는 ‘정본(定本)’으로서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삼국유사는 8만9300여 자이다. 3개 본은 모두 336개 목판으로 이뤄진다.
도감소에는 판각소와 함께 교정과 인출(목판에 박아내는 것), 제책(책으로 만듦) 과정을 진행하는 간역소(刊役所)가 있다. 간역소는 삼국유사 목판을 통해 문화를 꽃피운다는 뜻에서 ‘문성재(文盛齋)’라는 현판을 걸었다. 전시관에는 삼국유사와 일연국사의 삶을 소개하는 코너와 목판 제작 과정, 목판 소개 영상, 삼국유사 관련 자료 등을 볼 수 있다. 군위군은 인각사 정비사업을 비롯해 일연테마로드(5km) 조성, 삼국유사 문화축제 등 삼국유사와 관련한 다양한 사업을 펴고 있다.
삼국유사 목판 3종이 완성되면 단절된 역사를 계승하는 의미와 함께 우리나라 인쇄문화의 전통을 재발견하는 가치로 주목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옥영정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교수는 “조선시대 전기 목판인쇄물의 형태적 특징은 목판본 삼국유사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시기적으로 앞서고 이후 간행된 책의 형태와 판식 등에 모범이 돼 조선전기 전반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볼 수 있다. 삼국유사 목판 복원은 이러한 인쇄문화적 가치를 높이 평가한 결과이며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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