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 공무원 A 씨는 회의 때 모든 내용을 녹음한다. 나중에 법적 책임 소재를 규명해야 할 때를 대비해서다. 하도 말을 바꿔 대는 상사 때문에 마음고생을 하고 있는 대기업 직원 B 씨도 상사 말을 녹음한다. 대학병원 의사 C 씨는 진료실 앞에 ‘녹음 불허’를 써 붙여 놓았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환자들을 안심시키려고 건넨 말을 녹취해 의료소송을 당한 사례가 있어서다.
▷타인 간 대화를 제3자가 녹음하는 것은 위법이지만 대화 당사자가 상대 동의 없이 녹음하는 건 불법이 아니다. 단, 내용을 공개해 명예를 훼손하거나 협박하는 건 불법이다. 한국이 녹취에 관대한 ‘녹취 공화국’이라는 데 많은 이들이 공감한다. 미국은 대부분 주에서 불법이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국내 스마트폰 모델에는 ‘통화 중 녹음’ 기능을 기본 탑재하지만 북미와 유럽으로 수출하는 제품엔 빼고 있다.
▷녹음하느냐, 당하느냐. ‘녹취 없는 소송은 없다’는 말은 법조계 상식으로 통한다. 도청의 시대가 가고 녹취의 시대가 왔다는 말도 있다. 과거 도청은 정보기관의 전유물이었지만 녹취는 누구나 하는 흔한 일이 됐다. 녹취가 권력의 추악한 뒷거래를 고발하고 약자의 ‘최후 방어 수단’이 돼 주는 순기능도 있지만 사생활 침해까지 정당화돼선 안 된다.
▷2013년 대리점 주인에게 갑질한 남양유업 영업사원에 이어 지난해 이완구 전 총리를 물러나게 한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의 녹취록이 세상을 들썩이게 했다. 올해는 불과 20여 일 사이에 “(대통령이) KBS를 오늘 봤네”의 이정현 전 대통령홍보수석비서관, ‘민중은 개돼지’ 나향욱 전 교육부 정책기획관, 급기야 친박 핵심 최경환 윤상현 의원과 현기환 전 정무수석의 총선 개입 녹취록까지 나왔다. 요즘은 일반인들이 통화를 할 때도 상대가 녹음하는지 신경이 쓰인다. 그 짧은 통화 안에 음모와 술수, 거래와 협잡, 겁박과 회유, 권력을 좇는 추악한 탐욕의 언어들을 쏟아낸 그들의 저급함과 대담함이 놀랍다. 부끄러움이나 반성은커녕 ‘음습한 정치 공작’ ‘남자들의 세계’ 운운하는 무개념 무신경 오만방자함이 이 정권의 막장을 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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