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이 은밀하게 꿈꾸는 일탈, ‘로망’이라고 한다. 로망은 쉽사리 이뤄지지 않아서 로망이다. 대한민국군가합창단. 단원들이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이어서 관심을 끄는 합창단이다. 그뿐일까. 단원들은 군가를 부르며, 뭔가를 얻고 즐긴다. 익숙하지 않기에 오히려 신선한 긴장, 군가라는 독특한 영역, 무대가 주는 은근한 기대, 나중에 슬그머니 찾아오는 성취감…. 이게 로망이 아니면 무엇인가. 홍두승 대한민국군가합창단장(66·서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을 15일 서울대 캠퍼스에서 만나 50, 60대 남자들이 군가에 빠진 이유를 들어봤다.
먼저 군가합창단을 만들게 된 경위부터 물었다.
“2012년 10월 11일 이런저런 인연이 있는 사람 4명이 저녁을 함께한 적이 있었다(정확한 날짜는 홍 단장이 갖고 있는 수첩 덕분이다). 그 자리에서 나이도 먹고 했으니 군가를 부르는 모임을 하나 만들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 나온 게 시초였다.”
4명은 홍 단장과 김종완 전 재외동포재단 이사(66), 김효재 전 대통령 정무수석(64), 김영석 연세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62). ‘엉뚱한 제안’을 한 사람은 김 전 수석이었다. 홍 단장을 인터뷰할 때 그도 자리를 함께했다. 김 전 수석의 ‘로망’은 이랬다.
“2007년에 만든 미국 다큐멘터리 영화 ‘로큰롤 인생’을 보다가 영감을 얻었다. 영화에 나오는 노인밴드 ‘영앳하트(Young@Heart)’ 멤버의 평균 나이는 81세. 공영주택에 살던 그렇고 그런 평범한 노인들이 노래를 부르며 열정과 자존감을 발견하는 걸 보고 ‘나도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퍼토리는 군가로 하면 어떨까. 남자들은 군대라는 공감대를 갖고 있고, 노래를 못 불러도 군가는 부를 수 있을 테니.”
김 전 수석의 꿈은 ‘군연(軍緣)’ 덕분에 모양을 갖춰갔다. 김태영 전 국방부장관(홍 단장의 경기고 동기)과 한민구 국방부장관이 취지에 찬동하면서 그들의 군 후배, 홍 단장의 ROTC 선후배들이 속속 합류했다. 1년 만에 단원이 50여 명으로 늘었고, 지금은 80여 명(잠시 쉬는 단원까지 합치면 98명). 연습할 장소가 고민이었는데 역시 ROTC 출신인 김종섭 삼익악기 회장이 서울 학동로 삼익악기 빌딩의 훌륭한 연습실을 내줬다.
이 대목에서 ‘합창단원의 별이 100개’라는 말을 검증해봐야겠다. 40명 91개까지는 확인했다. 예비역 대장이 8명, 중장과 소장이 각 9명, 준장이 14명. 나머지는 교수, 기업인, 언론인, 음악가, 가수 등 다양하다.
합창단은 6월 20일, 서울 더 K호텔(옛 교육문화회관)에서 창단연주회를 가졌다. 멸공의 횃불, 행군의 아침, 진짜 사나이, 전우야 잘 자라 등 잘 알려진 군가 12곡과 독도는 우리땅, 아리랑, 초연 창작곡인 ‘우리의 산하(山河)’ 등을 불렀다. 1000석은 친구, 친지, 가족들로 거의 다 찼다.
공연이 끝난 뒤 친구들로부터 “제대로 된 군가 합창은 처음 들은 것 같다” “요즘 사회지도층이 제 구실을 못하는데 감동적이었다”는 격려를 받았다고 한다.
에피소드 하나. 단원들은 창단연주회에서 요즘 군인들이 입는 디지털전투복 상의를 입고 나왔다. 그런데 그거 짝퉁이다. 군에 부탁을 할까도 생각해봤지만 민간인은 군복을 입을 수 없다는 규정을 어길 수 없다며, 남대문과 동대문시장에서 짝퉁을 사서 입었다.
창단연주회는 확실히 지각 공연이었다. 그렇다고 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앞으로는 더 바빠질 것 같다.
“작년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열린 6·25 전쟁기념 식전행사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 공연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올해는 본행사에 나갔다. 8월 백범 탄생 140주년 행사, 9월 고양 킨텍스 지상군 페스티벌, 12월 한미친선협회 행사 등에도 출연한다. 매달 2, 4번째 월요일에 만나 연습을 하는데, 공연을 앞두고는 매주 모인다.”
지난해 6·25전쟁 기념행사 출연은 사실상의 데뷔공연이었다. 대선배인 참전용사들은 ‘전우야 잘 자라’는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훔쳤다. 군가의 힘이다.
‘잊지 못할 공연’이 한 번 더 있었다. 지난해 2월 홍 단장이 서울대 호암회관에서 정년퇴임식을 했을 때다. 단원들 30여 명이 찾아와 군가 3곡을 불러줬다. 이런 식의 퇴임축하를 받은 교수가 또 있었을까. 다른 하객들의 부러움을 샀다는 게 홍 단장의 자랑이다. 홍 단장은 부친이 육군경리감(준장)을 지냈기에 평소 군인과 군복의 프라이드를 존중한다.
요즘은 까다로운 시대다. 아무리 장군들이 노래를 불러도 ‘별 볼일 없으면’ 지속가능하지 않다. 편곡과 지휘를 맡고 있는 이판준 전 대구가톨릭대 음대 학장의 공이 큰 이유다. 서울대 음대를 졸업한 그는 ROTC 동기인 홍 단장의 부탁을 받고 앞뒤 재지 않고 합창단에 합류했다. 편곡한 곡을 노래한다는 것은 합창단 레퍼토리의 독창성과 격이 그만큼 올라간다는 뜻이다.
“군가라는 단순한 멜로디를 다양하고 전문적인 편곡을 통해 화음에 변화도 주고, 새롭고 활기찬 음악으로 변모시킬 수 있다. 단순한 군가를 훌륭한 합창 예술로 바꿔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음악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전문적인 편곡’은 전문가인 이 전 학장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는 말한다. “합창 연습은 그 자체가 공동체 의식을 길러주고 추억을 쌓는 과정이며, 실제 공연을 통해 긍지와 소속감, 성취감을 맛보게 해 준다. 군가합창단은 동료의식이 강하고 목표도 같기 때문에 좋은 합창단으로 발전할 수 있는 여지가 크다.”
실제로 그런 것 같다. 단원인 박남수 예비역 육군중장(전 육사교장)은 “전역 후에도 군과 장병들을 위해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과 만족감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창단 공신’인 김종완 씨는 “연습을 끝내고 갖는 회식을 ‘2교시’라고 하는데, 2교시의 친교가 생활에 큰 활력을 준다”고 했다. 2교시 경비는 공금에서 지불하고, 칼같이 오후 10시에 끝낸다. 합창단은 단원들이 입회비로 10만 원, 회비로 월 5만 원씩을 내서 운영하고 있다.
고민 없는 곳이 어디 있으랴. 합창단의 고민은 위문공연에 관한 것. 군가합창단이 대도시 무대에서 일반인 앞에 서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군부대를 직접 찾아가 장병들 앞에서 서자는 의견도 많다.
김 전 수석은 “군부대 위문공연은 처음부터 생각해 온 일이고, 합창단의 최종목표라고 생각한다. 일선부대의 짐이 되고 싶지는 않고, 공연시간도 길 필요가 없다. 문제는 경비다”고 했다. 합창단은 요즘 대기업들의 사회공헌활동과 연계해 지원을 얻는 방법 등 여러 가지 경비 마련책을 고민하고 있다.
“푸른 옷 벗었지만 가슴은 아직도 고동치네/무대를 전장 삼아 산하를 누비면/우렁찬 목소리에 병사들 가슴은 뛰고/총칼은 다시 일어선다//우리의 무기는 소리밖에 없으나/그 소리 포효가 되고, 굉음이 되어/전진, 또 전진한다/이긴다, 또 이긴다//보라 병사들이여, 들어라 전우들이여/그대들 곁에는 언제나 우리가 있나니/영원히 전하리라, 그대 승리의 노래를/우리는 대한민국군가합창단.”
이런 마음으로 군가합창단을 만들었을 단원들이 독지가들의 도움으로 ‘우리의 산하’를 누비는 날을 기대해 본다.
▼정성엽 예비역 해군 대령이 쓴 ‘군가이야기’로 본 군가의 역사▼
1907년 의병들이 부른 ‘의병창의가’가 최초… 김동진, 16곡 작곡해 최다 광복이후에 300여 곡 만들어져… 손원일 ‘해방행진곡’이 첫 현대 군가 청록파 시인 3명도 총 8곡 노랫말
대한민국군가합창단을 취재하기 위해 참고자료를 찾던 중 큰 도움을 준 책을 만났다. 정성엽 예비역 해군 대령(58·전 해군본부 정훈공보실장·사진)이 쓴 ‘군가이야기’라는 책이다. 비슷한 책조차 없기에 귀하긴 하지만 출판된 것은 지난달로 최근이다. 그는 전역 후 군가를 연구하기 위해 수원대 대학원 음악학과를 졸업했고, 지금은 한국군가정책연구소 부소장으로 있다.
이 책에는 재미있는 내용(어쩌면 처음 알게 되는 내용)이 많이 실려 있다. 우리나라의 근대적 군가는 1907년 일제가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해산하자 의병들이 민요 ‘새야 새야 파랑새야’의 가락에 맞춰 부른 ‘의병창의가’ ‘의병격중가’를 시초로 본다. 중국과 만주 등지에서 불렀던 항일독립가요는 외국 민요나 다른 나라 군가, 일본 가요에 가사를 붙였다고 한다. 1920년 청산리전투를 앞두고 이범석 장군이 군가를 직접 작사 작곡했는데 그 이름은 기전사가(祈戰死歌). ‘전사를 기원한다’는 비장한 제목이다. 1940년 광복군 결성 이후에야 비로소 진중작곡가들이 군가를 작곡하기 시작한다.
우리들의 귀에 익은 현대적 군가는 1945년 광복 이후에 나온 것들로 300여 곡 정도가 있으며, 애창곡은 50여 곡 정도. 현대적 군가의 효시는 1946년 1월 손원일 제독이 작사하고 부인 홍은혜 여사가 작곡한 ‘해방행진곡(海防行進曲)’. ‘해방’은 ‘바다를 방어한다’는 뜻. 부부는 ‘바다로 가자’는 곡도 만들었다.
1952년 10월 국방부는 군가제정위원회를 만들어 23곡만을 군가로 인정하고 30여 곡은 폐기했다. 군가를 관리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군가의 작사가로는 노산 이은상 선생(해군사관학교가, 충무공의 노래, 타오르는 횃불 등)과 윤수천 선생(젊은 용사들, 조국이 있다 등)이 각각 7곡으로 가장 많다. 그 다음은 6곡의 방송작가 유호(진짜 사나이, 승전의 노래 등). 6·25전쟁 중 그의 가사에 박시춘이 작곡하고 현인이 부른 ‘전우야 잘 자라’는 군가가 아니고 진중가요라 했지만 군가보다 더 많이 불렸다고 한다. 다른 방송작가 한운사(빨간 마후라, 브라보 해군 등)도 4곡의 노랫말을 남겼다. 청록파 시인 박두진(5곡), 박목월(2곡), 조지훈 교수(1곡)도 군가 노랫말을 지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군가 작곡가는 110여 명에 이른다. 이 중 최다 군가작곡가는 가곡 ‘가고파’로 잘 알려진 김동진 교수. 행군의 아침, 통일의 노래 등 16곡을 작곡했다. 육군 군악대장을 지낸 김희조 교수가 12곡, 해군 군악대장을 지낸 이운환 중령이 11곡, 이희목 김성태 전석환 씨가 각각 8곡을 작곡해 그 뒤를 잇는다. 진짜 사나이를 작곡한 이흥렬 교수도 6곡.
최근에는 국악과 랩을 가미한 군가도 선을 보이고 있다. 1997년 국방부의 군가 공모에서 대상을 받은 곡이 신동민 교수가 작사 작곡한 ‘산하(山河)’였다. 4박자의 국악장단을 채택했다. 병영에서는 잘 불리지 않았지만 군가합창단은 이번 창단연주회에서 ‘우리의 산하’로 이름을 바꾼 이 곡을 초연하며 상당한 애착을 보였다. 어려운 곡이어서 많이 틀렸지만, 열심히 연습해서 군가합창단의 간판 레퍼토리로 삼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정성엽 씨는 “내가 살고 있는 이 나라만큼 군가를 폄훼하는 나라가 있을까 싶다. 군가에 대한 인식을 바꿔 군가를 더 많이 활용하고, 군가 특유의 음악적 요소를 잘 개발한다면 최고의 병영문화로 꽃피울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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