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탐사기획/프리미엄 리포트/日帝 강제동원 ‘잊혀진 恨’]
시베리아 현장 가보니
‘조선인 10명 매장’ 기록된 현장, 러시아인들 공동묘지로 변해
사할린 한인묘지도 대부분 방치
日, 정부가 유해 체계적 수습
냉전 동안 오갈 수 없던 구소련 지역 소재 강제동원 피해자 유해는 그동안 미약한 봉환 사업에서도 사각지대였다. 동아일보가 러시아 서시베리아의 크라스노야르스크, 사할린 홀름스크 등에서 현지 취재한 결과, 군인과 노무자로 강제 동원됐다가 현지에서 사망한 조선인 무덤의 상당수는 찾는 이 없이 방치돼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달 22∼26일 조선인 시베리아 포로 문제를 연구해 온 이재훈 동국대 대외교류연구원 박사와 함께 시베리아 포로가 수용됐던 크라스노야르스크를 찾아가 보니 우뚝한 일본인 위령비만 있을 뿐 조선인 사망자와 관련된 내용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시베리아 포로는 일제 패망 뒤 소련군의 포로가 됐던 일본 관동군으로 관동군에 군인과 군속으로 징집됐던 조선인 3000여 명도 포함돼 있다. 이들은 시베리아 전역에 분산 수용돼 3년여 동안 강제 노동을 했다. 추위와 굶주림, 질병에 시달리다 사망한 이들은 시베리아 곳곳에 흩어져 묻혔다.
취재팀과 이 박사는 구소련 기록에 조선인 포로 10명이 묻혔다고 기록된 크라스노야르스크의 또 다른 매장지를 지난달 찾았다. 국가기록원이 입수한 소련 측 기록에는 이 지역을 포함해 모두 85명의 조선인 포로가 있었던 것으로 나온다.
자료에 기록된 지도에는 즐로비노 역 남쪽에 수용소가 있었고, 사망자들은 다시 그 남쪽에 묻혔다고 나온다. 현장 확인 결과, 매장지는 현재 ‘즐로비노 공동묘지’가 돼 러시아인들의 무덤으로 가득했다. 안타깝게도 조선인들의 무덤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같은 곳에 매장된 것으로 기록된 일본인들의 무덤도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이 매장지를 방문한 한국인은 취재진이 처음이다.
취재진이 발견한 것은 일본 크라스노야르스크 유족회가 묘지 입구에 세운 ‘진혼’이라는 목비뿐이었다. 일본 정부는 시베리아 포로 유해를 체계적으로 수습해 왔다. 일본인이 매장된 크라스노야르스크 니콜라옙스크 공동묘지에서는 멀리서도 ‘일본인 사망자 위령비’라고 쓰인 비석이 한눈에 들어왔다. 비석 한쪽에 ‘헤이세이(平成) 12년(2000년) 9월 일본국 정부 준공’이라고 쓰인 글씨가 선명했다.
크라스노야르스크 시 공무원 악쇼노바 씨는 “우리는 매장된 포로들이 모두 일본인이라고 생각해 왔다”며 “즐로비노 묘지에서는 일본인들이 유해를 가져가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인 유해가 어딘가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취재팀은 조선인 포로의 흔적을 찾지는 못했지만 그 대신 이곳 입구에 ‘조선인 포로들이여 편히 잠드소서!’라고 쓰인 위령비를 세웠다.
이 박사는 “국가기록원이 시베리아 포로 관련 기록을 수년 전 러시아 정부로부터 입수했지만 유해 봉환과 체계적인 분석은 앞으로의 과제”라고 말했다.
한편 사할린에 강제 동원됐다가 고향땅을 밟지 못하고 현지에서 숨진 한인들의 무덤도 돌봐줄 이가 없는 경우 그대로 방치되고 있었다. 사할린의 무연고 한인 묘는 대일항쟁기 위원회가 지난해까지 유해 30여 위를 봉환한 게 전부다.
4일 강제동원 한인들이 일했던 제지공장 등이 있는 홀름스크의 공동묘지를 찾았을 때에는 동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한인들의 묘가 여럿 발견됐다.
묘비에 ‘김정대(1914∼1966)’라고 쓰인 무덤은 아무도 돌보는 이가 없는 듯 수풀만 무성했다. 묘비가 없이 과거 봉분만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자리도 여럿 보였다.
사할린 무연고 무덤은 각 지역의 30여 개 묘지별로 수 기에서 수백 기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전수조사는 시작도 못한 상황이다. 한인들이 강제 동원된 탄광이 있던 시네고르스크의 공동묘지에서는 오래전 한인 무덤들이 비에 쓸려 내려가자 러시아인들이 수습했다고 알려진 자리도 확인할 수 있었다. 대일항쟁기 위원회가 사할린 묘지를 표본 조사할 당시 일했던 현지 관계자는 “사할린 중남부 토마리의 묘지에는 무연고 무덤이 300여 기 있는데 상당수가 한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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