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 고등학교 3학년 담임교사 A 씨는 2주 정도 남은 8월이 ‘뚝딱’ 하고 쏜살같이 지나가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3학년을 맡은 교사라면 대부분 그럴 것이다. 다음 달 각 대학의 수시전형 원서접수를 앞두고 1학기 학교생활기록부 입력을 완료해야 해서다. 최근 수시에서 학생부 중심 전형이 늘어나면서 교사가 기재하는 학생부 내용은 매우 중요해졌다.
교사들이 두려워하는 건 마감 시간뿐이 아니다. 이 시기에 밀려드는 학생부 수정 압박도 마찬가지다. 수시 원서접수 전 상담한다며 담임교사를 찾아와 “학생부 내용을 수정해 달라”는 학부모가 꽤 있다. 교육부 훈령에 따라 당해 학년도의 세부능력 및 특기사항,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 등은 공개할 수 없다. 정성평가 영역으로 교사의 평가권을 지켜주기 위해서다. 하지만 상담할 때 학부모가 자녀의 학생부를 보고 교사에게 출력을 부탁할 수 있다. 이때 협박 아닌 협박을 당한다고 하소연하는 교사가 적지 않다.
서울 B고의 한 교장은 올해 3월 황당한 경험을 했다. 한 학부모가 다짜고짜 교장실로 들어와 상장을 쭉 늘어놓고 “아이가 이렇게나 상을 많이 받았는데 왜 지난해 영어과목 ‘세부능력 및 특기사항’에 좋은 말이 안 쓰여 있느냐”며 “잘한 내용을 써 달라”고 우긴 것.
당해 학년도 이전의 학생부 내용 정정은 원칙적으로 금지돼 있다. 그래도 이 교장은 일단 해당 교사에게 자초지종을 들어봤다. 학생은 과제를 잘 해오지 않았고 수업 태도도 좋지 않았다. 성적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좋은 평가를 써줄 수 없었다. 교장은 “학생부가 중요해지니 일부 입시컨설팅 업체에서 ‘학생부가 잘 쓰여 있지 않으면 무조건 학교에 따져라. 그게 자식을 위한 길이다’라고 말한다더라”며 한숨을 쉬었다.
교사들은 이러한 학부모의 요구를 교권 침해라고 느끼기도 한다. 서울 C고의 진로 담당 교사는 “평가권은 교사가 갖고 있는데 학부모가 주관적으로 판단해 이래라저래라 하면 분명한 교권 침해라 받아줄 수가 없다”고 말했다.
학부모의 심정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입시에 대한 불안감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학생부 속 한 단어가 입시에 부정적이지는 않을까, 없던 문장이 새로 들어가면 합격에 도움을 주지 않을까 기대하는 탓이다.
하지만 불신과 부적절한 관여는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서울대 연세대 등 15개 대학 입학처장이나 입학본부장들에게 물었더니 그럴싸한 말만 있는 학생부는 중요한 평가요소로 고려하지 않는다고 한다(본보 7월 21일자 A28면 참조). 학부모들 등쌀에 밀려 학생부에 기재하고 싶은 내용을 학생 스스로 써오게 하는, 소위 ‘셀프 학생부’를 만드는 고교 리스트도 이미 파악하고 있다.
한 대학 입학처장은 이렇게 말했다. “입시를 오래 한 교사가 ‘전교 1등의 학생부도 좋은 말만 써준 적이 없는데 다 대학 잘 갔다. 그게 오히려 우리 고교의 신뢰도를 높이는 길이라고 믿는다’고 하더라. 그게 맞는 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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