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인 13일 평택∼제천 고속도로. 앞서 가던 차량이 갑자기 속도를 낮추더니 비상등을 깜박였다. 다행히 우리 가족을 태운 차량과는 거리가 꽤 있었다. 브레이크 페달을 밟고 비상등을 켰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곧바로 내 시선은 룸미러를 향했다. 뒤에서 오던 차량이 제대로 멈췄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뒤따르던 승합차가 안전하게 멈춘 것을 본 뒤에야 비로소 불안했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얼마 전부터 고속도로를 운전할 때 새로 생긴 습관이다. ‘전방 주시’와 ‘안전거리 확보’만으로는 나와 내 가족의 목숨을 지킬 수가 없다. 고속도로 위에서 아무리 기를 쓰고 교통법규를 지켜봤자 뒤에서 시속 100km로 들이받는 버스를 막아낼 재간이 나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요즘 주위를 둘러보면 나와 비슷한 운전자가 많다. 고속도로에서 정체 구간에 이르면 앞보다 뒤가 무섭다는 운전자들이다. 그러면서 모두 “그 사고 때부터”라고 말했다. 바로 지난달 17일 영동고속도로 상행선 봉평터널 앞에서 발생한 관광버스 연쇄 추돌사고다.
20대 여성 4명의 목숨을 한순간에 앗아간 사고였다. 질주하던 대형 버스가 멈춰 선 승용차의 뒤를 그대로 들이받는 블랙박스 영상은 보는 이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 줬다. 운전 공포증을 호소하는 사람도 있었다. 공포는 지난달 31일 24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부산 해운대 교통사고의 영상으로 인해 최고조에 달했다. 여기에 일가족을 태운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이 주차된 대형 트레일러에 부딪혀 4명이 숨진 사고 영상까지 공개됐다. 이쯤 되면 ‘블랙박스 쇼크’다.
블랙박스 쇼크가 공포만 불러온 건 아니다. 긍정적 효과도 상당했다. 모든 언론이 사고 소식을 대서특필했다. 대형 차량 운전자의 상습적인 졸음운전, 허술한 운전면허 관리, 흉기로 돌변하는 불법 주정차 차량 등의 문제를 지적하는 뉴스가 한 달 가까이 계속됐다. 이렇게 짧은 기간에 이렇게 많은 교통사고 뉴스가 쏟아진 걸 본 기억이 별로 없다. 블랙박스가 없었다면 아마 일회성 보도에 그쳤을 것이다.
블랙박스의 또 다른 긍정적 효과는 미궁에 빠질 뻔한 사고의 원인을 밝혀낸 것이다. “차로 변경 중 사고를 냈다”는 관광버스 운전사의 거짓말을 잡아냈고 뇌전증으로 기울었던 해운대 사고의 원인이 실은 뺑소니 운전일 가능성이 높다는 걸 밝혀냈다. 무엇보다 음주운전 졸음운전 난폭운전 등 교통안전 전반에 걸쳐 우리 사회의 경각심을 높였다는 게 가장 크다. 4년째 교통안전 캠페인을 진행하는 입장에서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선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는 걸 숨길 수 없다. 아마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어지간한 교통사고 영상에 무덤덤해질 가능성이 높다. 더 충격적이고 더 끔찍한 블랙박스 영상에만 반응할 것이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교통사고의 원인과 근본적인 문제점을 끈질기게 확인하는 대신 블랙박스 영상의 ‘수위’만 따질지도 모른다.
최근 한 지상파 방송은 블랙박스 영상을 전문적으로 소개하는 정규 프로그램을 신설하기로 했다. 다양한 블랙박스 영상을 보여주고 전문가 진단과 함께 원인과 예방법을 제시하겠다는 것이다. 취지만 놓고 보면 박수 받을 일이다. 하지만 교통사고 영상에 쏠린 관심이 높은 시청률로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가 너무 큰 건 아닌지 걱정이다.
같은 충격이 잦아지면 둔감해질 수밖에 없다. 그 순간 블랙박스 영상은 인터넷에서나 찾아보는 자극적인 감상용으로 전락할 수 있다. 해결책은 분명하다. 정부가 제대로 된 교통안전 정책을 내놓고 뚝심 있게 추진해야 한다. 경제논리에 치이고 우선순위에 밀려 유야무야된다면 한국의 교통안전은 블랙박스 속에 갇힌 채 조금도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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